로마서 8장 후반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심을 확신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023. 6. 12. 07:49성서유니온 매일성경/로마서


로마서 8:31-39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장 중간부와의 연결, "그런즉"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그런즉"으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말한 논지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31절부터 이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모든 피조물과 성령님과 우리가 탄식함으로 우리 몸의 속량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우리 몸의 속량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요 영화롭게 되는 것인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로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우리가 몸으로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지 영적으로는 이미 받아 누리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몸으로 경험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 내용에 "그런즉"이 붙었습니다. 즉, 8장 중간부의 내용은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31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셔서 우리에게 어떤 것이 이미 주어졌는지는 8장 중간부에서 말씀했습니다. 이제 8장 마지막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씀의 근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심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할 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이 아니시냐, 이렇게 답하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 주셨으니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즉 하나님은 우리를 이토록 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3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희생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위하시는지는 그 아들, 독생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서 내주신 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것을 원하시고 그 일을 실행하실 때 그 아들 예수께서 희생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희생이기도 합니다. 실로 모든 것을 내어주는 희생을 치르신 하나님이신데 그 어떤 것을 아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간구, 중보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셨으니 아무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계속 간구하고 계십니다. 현재시제로 쓰였습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계속 간구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간구하신다는 말은 헬라어로 엔퉁카노(ἐντυγχάνω)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중보하고 있다(is interceding)고 번역합니다. 이 엔퉁카노(ἐντυγχάνω)는 과녁을 빗나간다는 의미의 죄와는 반대되는 의미로 쓰입니다. 즉 딱 맞추다, 정확한 지점을 때린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중보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여겨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생각하신 의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여야하는 인간상이 있습니다. 그 모든 의를 예수님께서 이루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그 의를 보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33절)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로마서 8장 후반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심을 확신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시편 44편 22절을 인용함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생명을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아무도 이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시편 44편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 말씀에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입니다.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심, 죽음

"주께서 우리를 잡아 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시 44:11)" 여기 나오는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신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죽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는 땅에서 유배되어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죽음을 맛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4:17)"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은 예수님께서 어떤 죽음을 맞이하실 것인가에 대한 예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그들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여러 민족 중에 흩어져 유리 방황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망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이 언약이 효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여 떠난 자가 받을 처분인 지옥의 고통이 담긴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셨습니다. 그렇게 의롭게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죽임을 당하셔서 모든 허물을 다 사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유배 상태 가운데에서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으나 다시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일어났던 이 일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가 용서된 사건을 아는 사람으로서 사도 바울은 시편 44편의 시인처럼 반응하지 않고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라고 반응합니다. 여기서 넉넉히 이긴다(ὑπερνικάω)는 말씀은 승리 이상의 승리로 이긴다는 뜻입니다. 즉,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긴다는 뜻입니다. 시편 44편의 시인은 자기들에게 닥친 시련으로 하나님께 탄원을 올렸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승리한 우리는 탄원이 아니라 확신으로 반응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백하는데 "내가 확신하노니" 하면서 고백합니다(38-39절).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의심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상황일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이토록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