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누가복음 10장 25-42절 | 율법교사와의 대화와 마르다의 불평

2025. 4. 23. 09:21성서유니온 매일성경/누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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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누가복음 10:25-42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70인의 증인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두 명 씩 35팀으로 각 마을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함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알았습니다(10:21-22). 그들이 보고 경험하는 것은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님 사역의 절정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행위에 초점이 있는 율법교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25절). 율법 교사가 시험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테스트했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 교사는 질문의 형식으로 시험했는데 그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였습니다(25절). 이 질문은 율법교사답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26절). 네가 정말 몰라서 묻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율법 교사는 27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율법을 요약했습니다(27절). 이 요약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한 것으로 참 잘한 요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대답이 옳다고 하셨습니다(28절). 그러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28절 하). 율법교사가 영생을 물었기 때문에 여기서 "살리라"라고 하신 것은 영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씀은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레위기 18장 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수님께 칭찬을 들은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또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였습니다. 이 사람은 여전히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서 말한 모든 의를 다 지켜서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부패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행해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옆에서 본 사람들은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한 것을 본 사람들로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10:23-24). 그런데 이들보다 복된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 더 복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20:29).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는 율법 교사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야기 하나를 해 주시고 똑같이 물음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 것은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였습니다(36절).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과 첫번째로 그를 지나간 제사장, 두 번째로 그를 지나간 레위인, 세 번째로 그를 지나가다가 그를 돌보아준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세 번째 사람, 사마리아인입니다. 

     

    여전히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율법교사는 이웃이 누구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웃이 누군지를 알면 그를 사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행위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누구냐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너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될만한 사람이냐,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마라이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나를 사람 취급 안 해도 그가 어려움을 당했다면 그냥 도와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웃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고 사랑의 율법이 그 마음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37절).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교사가 보기에 이단이고 상종 못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37절). 이 말씀은 율법교사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만한 대답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예수님

    강도 만난 사람에게 찾아와서 그를 살리고 돌본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그 백성은 예수님을 잡아서 로마 당국에 내어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준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리고 여리고로 가서 여관에서 잘 돌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리고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보았습니다. 이제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 어떤 테러를 당할지 모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 그를 살린 대가가 죽음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믿고 예수를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영생의 길은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38절은 "그들이 길 갈 때에"라고 합니다.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 길에 마르다의 집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고 하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마르다가 한창 손님 맞이에 바쁜 동안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39절). 마르다는 그것이 못내 서운했습니다. 당위로 따지자면 마리아가 마르다를 돕는 것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은 특수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듣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쪽이 훨씬 좋은 쪽이었습니다(42절). 

     

    그러면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은 좋은 쪽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도 좋은 쪽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그분을 영접하여 식사를 대접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 일을 하겠는가 물어보면 누구라도 하겠다고 할만한 귀중한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어떤 일로 어떻게 가시는지 다 알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았습니다.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당위로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특별히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역사 가운데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마르다의 섬김은 훌륭했지만 그는 자기의 좋은 편을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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