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누가복음 5장 27-39절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2025. 4. 5. 11:05성서유니온 매일성경/누가복음

반응형

목차


    누가복음 5:27-39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나병환자를 고치심의 의미

    예수님은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는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5:13). 이것은 예수님의 거룩함이 사람을 죽이는 거룩함이 아니고 사람을 살리고 정결하게 하는 거룩함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성육신이었습니다. 나병과 접촉했을 때 나병 걸린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결해졌습니다. 반대로 나병과 접촉했을 때 예수님이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니고 나병환자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심의 의미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먼저하셨습니다(5:20).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먼저 하신 다음에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물으시기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거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5:23). 이 두 가지 모두 사람에게는 불가능하거나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죄가 대적하는 하나님, 모든 죄의 일차적 피해자가 되시는 하나님께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이 쉽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는 "일어나 걸어가라"라는 말도 쉽습니다. 이 두 가지 말 중에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먼저하신 것은 죄가 하나님의 영광만 해치는 것이 아니고 사람도 해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죄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 문제의 근원입니다. 그 근원이 없어진 다음에야 성한 육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죄인이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면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그 육체로 죄만 더 짓게 됩니다.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의인이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면 그 육체로 의로운 일을 열심히 합니다. 중풍병에서 일어나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문제의 근원을 먼저 해결해야 그 위에 뭔가를 쌓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려운 일 중에서 쉬운 일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쉬운 일 중에서 순서상 중요한 일을 선택하셔서 먼저 행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레위라 하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27절). 이 레위는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입니다. 세리라는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사도가 된 인물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관리라기 보다는 자영업자에 가까웠습니다. 세금 징수권을 자기 돈을 들여서 사서 징수 금액을 로마로 보내고 자기는 그 나머지 금액을 이득으로 취하는 사람들이 당시 세리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창녀와 함께 언급될 정도로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28절). 그가 버린 모든 것은 세금 징수권을 포함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그에게 "나를 따르라"라는 명령이 어떻게 들렸길래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렇게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강력한 이유는 그 부르심이 인간 의지를 꺾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강력한 이유는 인간 의지에 성령께서 작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인간 의지에 작용하시면 사람의 마음은 부드럽게 되고 감동을 받으며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발성이 살아납니다.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은 아무 가치 없게 여기게 됩니다. 세리 레위에게는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정죄하는 율법

    예수님께서는 레위의 집에서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레위의 직업이 세리였던지라 그 자리에는 다른 세리들도 많이 참석했습니다(29절). 그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30절). 우리도 한솥밥을 아무나 함께 먹지 않습니다. 그만큼 같이 밥 먹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보다 유대인이 훨씬 그것에 민감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으면 자기도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으면 그것으로 자기들도 함께 부정해지고 부정해진 것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고치는 복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절)" 이 말씀으로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레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죄인이었습니다. 그 죄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찾아가셔서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과 동시에 성령께서 레위의 마음에 작용하셨고 레위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이전에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가 회개한 증거입니다. 그렇게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의 마음 방향은 이제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레위가 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가시고 그를 부르셔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 알아야 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은 죄인이 아닌척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큰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들입니다. 반면 세리는 자기들이 죄인일 줄 아는 죄인들입니다. 이 둘이 있을 때 회개하기 좋은 쪽은 자기들이 죄인인 줄 아는 죄인들 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불러서 회개 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혜택을 받는 쪽은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들립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것으로 들립니다. 복음이 나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신 놀라운 사건과 잔치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교했습니다(33절).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고 비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집 손님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 지금은 잔치하고 먹고 마실 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만큼 성대한 잔치가 열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죄인을 구하러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친히 내려오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랍고 놀라운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금식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잔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38절). 이 말씀은 새 시대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은 시대를 가르는 일입니다. 실제로 세계 역사는 주전과 주후로 갈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서기 달력을 쓰게 되었는지 역사를 따지지 않아도 지금은 전 세계가 서기 달력을 기준으로 날짜를 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때를 기준으로 역사가 갈리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담을 부대도 새 것이어야 합니다. 이 새 포도주의 시대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모든 이의 죄가 사해지고 성령께서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함께 거하시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율법이라는 낡은 부대로는 담을 수 없는 새로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폐하여진 것입니다. 율법이 폐하여진 것은 율법의 정죄 기능이 더이상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기능은 여전히 하지만 율법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낡은 가죽 부대는 터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낡은 율법 기준으로 새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낡은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로 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묵은 것을 고집했습니다(39절). 그 묵은 것으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오히려 그들의 가죽부대가 터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율법의 정죄 기능이 폐하여진 것입니다. 율법은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고 징계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원래 살리는 기능을 했던 것이 죽이는 도구가 되었다가 그 살리는 기능이 회복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으로 "정죄"를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서 회개 시키셔서 살리셨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가죽 부대인 율법도 사람들을 살리는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회심하게 하고 믿는 사람을 가르치고 회개하게 해서 의로 교육하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새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의 시대입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