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디모데전서 1장 1-11절 | 바울과 디모데, 복음과 다른 교훈

2024. 11. 1. 20:39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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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디모데전서 1:1-11

    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저작연도와 저자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후 62년경에 로마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 때 다시 전도여행을 하면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66-67년경 네로 황제 때 다시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기록합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빌립보에서 기록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바울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1절에서 11절은 한 단락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1절은 바울(Παῦλος)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11절은 나(ἐγώ)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1-11절의 주제는 바울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1-11절의 주제인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 할 때 가장 중요하게 나오는 것이 바로 "사도"라는 말입니다. 바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사도(ἀπόστολος)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도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사도라면 보내신 이가 있습니다. 보내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울을 보내셨는데 자의로 보내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냐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누구시냐 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1절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기가 사도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로 보내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바울을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도로 보냄을 받은 이유는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11절). 그리고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는 "나", 즉 바울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정체성은 복음에 있습니다. 이것이 1절부터 11절을 감싸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2절은 "디모데에게(Τιμοθέῳ)"로 시작합니다. 디모데는 이 편지의 수신자입니다. 바울이 쓰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서 "디모데에게"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이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이 사명을 함께 당당하는 사람으로 또는 그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사람으로 디모데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의미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것은 아끼고 사랑하는 연소한 사람이라는 의미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 아들이라는 말은 아버지의 말을 듣는 사람, 아버지의 일을 이어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믿음 안에서 아들이기에 믿음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은혜(Χάρις)와 긍휼(ἔλεος)과 평강(εἰρήνη)"을 전합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놀라운 것을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평강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은 특별히 구원과 연관됩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동시에 긍휼을 입어서 모든 일에 평강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 좋은 것들, 즉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 이끌어준 구원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사도 바울은 아버지이고 디모데는 아들입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사도입니다. 사도는 어떤 임무를 부여 받고 보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여 받은 임무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벌써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교훈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다른 교훈을 경계하였기 때문에 디모데를 권해서 에베소에 머물도록 했습니다(3절).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도록 한 이유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떠나 마게도냐로 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움직이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도록 함으로 다른 교훈이 에베소에 퍼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복음이 아닌 가르침

    다른 교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18쪽). 

    칼빈은 옛글에서 인용하기를, "얻은 것을 보관하는 덕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구하였던 덕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교회의 원수는 무엇보다 이단이다. 그것은 교회 내부에서 은밀히 참된 교리를 변경시킨다. 그러나 밖에서 교회로 침입해 들어오는 이단도 있다(행 20:29). 그러므로 교역자들은 세운 교회를 바로 지키는 일에도 주력해야 된다. "다른 교훈" 곧, 이단은 노스틱주의 색채가 있는 유대주의로서 그것은 금욕주의(禁慾主義)와 허탄한 이야기를 퍼뜨리기 위하여 구약을 그릇되이 이용하였다고 한다(Dr. C. Bouma). 

     

    다른 교훈(ἑτεροδιδασκαλεῖν)은 "복음이 아닌 모든 가르침"을 뜻합니다.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훈은 굉장히 다양하고 여러 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신기한 것도 있고 새로운 말도 거기에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귀를 혹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교역자들이 그런 교훈에 쉽게 흔들립니다. 교역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말씀을 전할 때 뭔가 자꾸 신기한 것을 전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다른 교훈에 유혹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참으로 깊고 신비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이성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꾸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애쓰고 기도하며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복음 진리를 점점 모르게 됩니다. 점점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복음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역자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기가 쉽습니다(4절 상). 그것이 어두운 눈으로 보기에 사람 수준의 지식으로 도달하기 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신화와 족보

    박윤선 목사님은 신화와 족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18쪽). 

    신화(μύθοις)는 앞절에서 말한 유대주의자들이 구약에 있는 족보에 붙여 말했던 여러 가지 허황(虛荒)한 이야기이다. 유대의 랍비들은 유대인의 족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헛된 상상을 하기 좋아하였다(Dr. C. Bouma). "끝 없는 족보에 착념"함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대인의 족보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조작하면서 그칠 줄 모르는 헛된 연구를 가리킨다. 

     

    이것을 우리나라 상황에 적용한다면 설교에 유교를 가져다가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겸손을 가르치면서 성경이 말씀하는 겸손을 가르치지 않고 유교적인 겸양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윤리요 도덕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수준에 있어서 훨씬 높고 고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설교에 가르칠 것은 아닙니다. 설교에서 주로 전해야 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잘 보면 복음과 유교적인 윤리는 완전히 정반대를 향합니다. 복음은 은혜를 향하지만 유교의 윤리는 인간 스스로 어떤 경지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성경은 그것도 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기 의를 추구하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다고 합니다(롬 9:32). 그런데도 강단에서 끝없이 유교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목회자가 복음을 어떤 공식으로 치부하고 자기는 안다고 착각하면서 끊임없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변론을 냄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냅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하면서 논쟁을 벌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것을 뜻합니다. 경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인데 이 말은 한 집안을 관리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실 때 마치 집안 관리인이 집을 잘 관리하는 것처럼 다스리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가실 때 뜻하시는 일이 있고 그 일을 이루시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룹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명백한 계획과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와 끝없는 족보는 논쟁을 이룹니다. 끊임없는 갈등을 만드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자꾸 사람 수준의 이야기만 들리면 사람 내면에서 갈등이 증폭됩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나빠집니다. 논쟁만 무성해 집니다. 마치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되는 것입니다(막 11:13). 

     

    계시 의존 사색과 자율적 사색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19쪽).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사색은 변론을 끝없이 가질 뿐이고, 진리를 아는 만족과 평안에 이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지 않고 불가능한 자율적 사색(自律的思索)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망상이기 때문에 성과가 없고 끝없는 수고가 될 뿐이다. 

    인생이 자율주의에 의하여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계시(성경)를 주셨을 이유조차 없었겠다. 구원의 진리는 오직 계시, 곧 성경 말씀에 순종해서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딤후 3:15). 다시 말하면, 구원의 진리는 연구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율주의를 회개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연구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하셨다. 모든 불신앙 철학자들은 자율주의자요 따라서 진리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그 변론은 끝나지 않는다. ... 인간은 성경 밖의 어떤 철학이나 과학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또는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없다. 

    이 교훈의 목적인 사랑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가 다른 교훈이라면 참된 교훈이 있습니다. 5절에 나오는 교훈(παραγγελία)의 어원적 의미는 "가까이에서 전해지는 어떤 것(something announced from close-beside)"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가리켜서 보혜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수준에서 만든 어떤 것이 아니고 성령 하나님께서 바로 옆에서 전해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령님

    복음은 사람의 수준에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아무리 들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것을 깨달을 때에는 성령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직접 역사하셔서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깨닫게 되는 교훈은 청결한 마음을 갖게 하고 선한 양심을 북돋웁니다. 그리고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지게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이끕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20쪽). 

    교훈의 목적이 "사랑"이라는 것은 바울 서신들이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동시에 (롬 13:10; 갈 5:14), 예수님의 교훈에 부합한다(막 22:37-40). 그러나 율법을 오용(誤用)하는 이단자들은 율법으로 사람을 속박하기 위하여, 그것에 머리카락을 쪼개는 듯한 번쇄한 세칙(細則)들을 첨부한다. 그것이 당시 랍비들의 그릇된 교훈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오류(誤謬)를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율법의 목적은 그렇게 번쇄한 세칙의 그물 속에 신자들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니고 심령(心靈)에서부터 자진하여 사람을 행하게 함이라고 한다. 반면에 율법주의에 속한 사람은, 가혹한 주인 앞에서 떨고 있는 노예같이 눈가림과 형식으로만 율법에 복종한다. 

    복음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바른 교훈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복음은 사랑에 이르게 하지만 복음에서 벗어나면 헛된 말에 빠지게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이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사랑, 이웃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다른 교훈은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만든 번쇄한 세칙들이 사람들의 주의(主意)를 끌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덕을 세우지는 못하는 것이니만큼 헛된 것이다" 문제는 교역자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담백하게 전하지 않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하기 때문에 온갖 번쇄한 것들을 새로운 것인 것마냥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헛된 것입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7절). 그런데 잘 보면 그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깨닫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깨달은 듯이 말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 말의 결과가 어떻게 도출이 될지 전혀 모릅니다. 어떤 깊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그들이 맺는 열매는 들포도입니다. 교역자는 항상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율법을 적법하게 쓰면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옳은 사람

    율법은 따로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즉 "적법하게" 쓰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8절). 율법을 적법하게 쓰려면 그것을 자꾸 "옳은 사람"에게 굴레 씌우면 안 됩니다(9절). 여기서 옳은 사람이란 다음과 같은 사람입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22쪽). 

    (옳은 사람이란 말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는 데 있어서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공로로 되는 것이고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이 점만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이유는, 이 아래 11절이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사람이 의를 얻는 문제에 있어서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엇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스(Jeremias)도 말하기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이 된 자는 율법 조문의 노예적인 속박을 면한다(롬 10:4; 갈 5:18). 율법에서 해방된 이와 같은 자유는 바울에게 맡겨진 복음의 중심 요소가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옳은 사람이란 말은 자기 힘으로 의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롭다함이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사용할 때에는 의를 얻으려고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점점 하나님과 같은 성품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사용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내가 의로워지려고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사용해야 하는 대상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옳은 사람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자꾸 정죄하고 판단하는 데에 율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노력을 강요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9-10절). 이 목록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목록은 십계명의 순서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묵상할 때에는 내가 그 계명들을 지켜서 의를 얻으려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혹시 범죄한 것은 없는가, 자기를 돌아보고 끊임없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미 의를 얻은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죄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로 죽이고 하나님께로 자꾸 돌이키기 위해서 율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옳은 사람에게 율법은 항상 복음과 함께 작용합니다. 

    바른 교훈

    10절에는 "바른 교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른 교훈은 건전한 가르침, 건강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건전한 가르침, 건강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릅니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를 얻게 합니다.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크신 것인가를 찬양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 포함된 바른 교훈의 역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을 적법하게 쓰면 복음 안에서 놀랍게 작용합니다. 

    분별하는 방법

    어떤 것이 율법을 적법하게 쓰는 것이고 어떤 것이 율법을 불법적으로 악하게 쓰는 것인지 이 차이가 참으로 미묘합니다. 그것을 쓰는 과정만을 보면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 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어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다(마 7:22-23).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열매를 보면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마 7:18). 이 원리에 따라서 만약 어떤 이의 가르침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한다면 그 가르침은 율법을 적법하게 사용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집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성품이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 결과 그 공동체 안에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사랑이 넘칩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이의 가르침이 그것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갈급하게 하고 배 고프게 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과 다툼을 일으킨다면(4절) 그 가르침은 율법을 악하게 사용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퇴보합니다. 자기가 왜 사는지 사명에 대한 자각이 점점 옅어집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경쟁하고 다툽니다. 이런 열매가 맺힌다면 그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교역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했습니다. 바로 위와 같은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생각해 볼 때 다른 교훈을 전하는 교역자가 많지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선 나 자신부터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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