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3. 07:3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전서
목차
찬송가 505장 온 세상 위하여
교역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교역자의 직분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1:12). 교역자는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1:14-15). 자기도 긍휼을 입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1:16). 긍휼을 입은 사람으로서 믿어서 영생을 얻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1:16). 여기서의 본은 행실의 본이 아니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구원의 본입니다. 교역자는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옭아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1:20). 그런 교역자는 믿음에서 파선한 사람입니다(1:19). 그렇게 교역자에게 대해서 가르친 다음 바울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1절).
첫째로 권하노니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1절은 "내가 권한다(Παρακαλῶ)"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보혜사는 원어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옆에서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역하자면 옆에서 말로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가 권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 말을 도움으로 받으라는 뜻입니다. 마치 성령님께서 옆에서 말씀해 주심으로 도와주시듯이 그런 도움으로 이 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한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권한다는 뜻입니다.
선한 싸움과 기도
바울은 "내가 권한다"라고 하면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씁니다. 앞의 내용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앞의 내용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내용입니다(1:18).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싸움, 즉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1:18-19). 이 명령과 바울이 권하는 것이 "그러므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것에 우선해서 권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원어로는 "첫째로" 뒤에 "모든 것의"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권면은 교역자로서 싸움을 싸울 때 모든 것의 첫째로 행해야 할 것이 있다는 권면인 것입니다.
간구, 기도, 도고, 감사
바울이 권하는 것은 "행하는 것(ποιεῖσθαι)"입니다. 행하는 것 뒤에 네 가지 행할 것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간구(δεήσεις)와 기도(προσευχάς)와 도고(ἐντεύξεις)와 감사(εὐχαριστίας)입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가지는 기도와 연관됩니다. 이 기도들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0쪽).
"간구(δεήσεις)"란 말은 일정한 요구건을 가지고 하나님께 청구함이고, "기도(προσευχάς)"는 신자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며 기원하는 모든 행위를 총칭하고, "도고(ἐντεύξεις)"는 남들을 위하여 기도함이다.
여기서 특별히 도고(ἐντεύξεις)는 원어의 뜻을 살려서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뜻에 따라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기도입니다(intervention led by God, marking intersection between heaven and earth as it reflects the Lord's specific will).
이 세 가지 기도 다음에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신자는 끊임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기도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신자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므로 신자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교역자는 더욱 이것을 믿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네 가지,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는데 "모든 사람을 위하여"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0쪽).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함은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책임을 제한하지 않고 누구든지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는 1)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을 사모하는(시 42:1) 신자이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모하지 않는 자는 남을 위한 기도를 하지 못한다. 욥 27:10 참조. 2)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는 기도의 위력(偉力)을 믿는 자이다. 요한 낙스(J. Knox)는 기도의 힘을 믿는 개혁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힘있게 기도했다. 그의 기도에 대해 사람들은 말하기를 "스코틀랜드의 군대보다 강하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를 대적하던 메리 여왕도 역시 그렇게 알았다. 3)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는 인류를 제 몸 같이 사랑하는 자이다. 그는 누구를 보든지 그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로 안다. 그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할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다. 눅 6:28 참조.
여기에 감사를 더하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감사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가장 선하신 길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감사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네 가지, 즉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 중에서 특별히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직격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이 정치를 잘하면 그 다스림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1쪽).
"경건과 단정"은 신앙생활의 두 방면이니, "경건(εὐσέβεια)"은 하나님께 대하는 거룩한 생활이고, "단정(σεμνότης)"은 신자로서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엄숙히 다스리는 근엄(謹嚴)한 처신이다. 이런 생활은 보통으로는 안전한 환경에서 잘 유지된다. 불안한 사회에서는 건전한 인격이나 경건이 배양되기 어렵다. 안전한 사회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은총 중 하나이다.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안전한 사회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회를 주실 때에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다스림을 통해서 주십니다. 이것을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믿는 자들은, 특히 교역자는 세상의 권력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권력을 잘 사용해서 사회가 안정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안정이 되어야 사람들이 영적인 것, 고차원적인 것에 마음을 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안정이 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생존에 모든 에너지를 쏟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묵상하고 알아가면서 성경으로 그 자신의 사상체계를 방대하게 세울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경건, 즉 하나님을 대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단정, 즉 자기 자신을 엄숙하게 다스리는 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회의 안정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중에 경건하고 단정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만 하는 어떤 율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여겨서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러한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4절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권력자들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회의 안정이 복음의 진보에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분과 모든 사람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5절은 "한 분이다(Εἷς)"라고 하면서 이어서 "왜냐하면(γὰρ)"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2쪽).
하나님께서 민족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의 진리를 알기 원하시는(4절) 이유는 사람은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그 어느 민족에게나 똑같은 관계를 가지시고 똑같은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롬 3:29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 3:22 참조.
사람마다 각자의 신을 만들고 그것을 섬깁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헛것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없는 신을 만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한 분의 소생입니다. 인식하든 못하든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원하시는데 중보자도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중보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이 중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하면서 "사람이신"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사람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그 어떤 사람도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보자도 한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 말은 속죄의 효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의지할 때 모든 사람이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대속물(ἀντίλυτρον)"이란 원래 대신해서 갚아주는 돈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생명을 모든 사람의 생명의 속전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가치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 가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이 일은 기약이 이르러 일어난 일입니다. 즉 구약에서 계속 예언되었던 일인데 때가 차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취하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도 바울은 "증거(μαρτύριον)"라고 합니다. 이 증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증거요 하나님의 공의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언약궤를 증거궤라고 한 것과 같은 뜻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증거요 그들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은혜의 증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신 것은 바로 그러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앞에 나온 증거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셨음을 자기도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십자가의 구원을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바울은 전파하는 자, 즉 설교하는 자, 선포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복음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이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맹세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진리 안에서" 된 일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 진리를 아는 방법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어야 이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믿음을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전파할 따름입니다.
7절까지 종합해서 살펴보면, 기도의 목적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물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목적입니다(3절). 그런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 즉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해야 하고 특별히 권력자들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히 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1:20)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크게 위해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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