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 14:53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전서
목차
디모데전서 1:12-20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1-11절을 바울(Παῦλος)로 시작해서 나(ἐγώ)로 마칩니다. 그러므로 1-11절의 주제는 바울입니다. 바울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바른 교훈을 맡은 사람입니다(10-11절). 바른 교훈을 맡아서 전해주어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중요하게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는 "다른 교훈"을 구분해서 배척하는 것입니다(3절). 그 일을 위해서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서 아들로 삼은 디모데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2절).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이 귀한 사역을 이어서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다른 교훈은 배척하고 바른 교훈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도록 하고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5절).
감사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2절은 감사(Χάριν)로 시작합니다. 직역하면 "감사를 나는 가지고 있다"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냐며면 나를 능력 있게 하신 분에게 감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나를 능력 있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교역자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교역자들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냐면 내가 복음을 알고 믿고 전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믿고 전하는 것이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감사는 이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맡은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나를 능력 있게 하신 분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직분
나를 능력 있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직분입니다. 그 뜻은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구약을 보면 세 가지 직분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바로 그 직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나를 능력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역자에게는 왕적 사명이 있고 제사장적 사명이 있고 선지자적 사명이 있습니다.
왕
교역자는 양떼를 돌보고 치리하는 측면에서 왕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역할 때문에 몇몇 교역자들은 쉽게 타락합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왕국"으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교역자에게 왕적 사명이 있는 것은 양들을 말씀으로 잘 가르쳐서 그들이 무엇이 진리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하도록 돕는 사역입니다. 그렇게 해서 악한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제사장적 사명은 평소에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가르쳐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사역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 예배를 인도하며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역이 제사장적 사명에 속합니다. 예배 인도에는 말씀 선포와 성례의 바른 시행이 들어갑니다.
선지자
선지자적 사명은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경고하고 돌이키는 사명입니다.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빨리 감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부분을 분별하여 개혁하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도 말씀으로 이루어지는데 특별히 권징이 함께 이 사명에서 이루어집니다.
교회
모든 성도가 이런 사명을 가지고 있지만 교역자는 특별이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서 능력을 주신 사람들입니다. 교역자는 주어진 능력이 사명을 위한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왕적 사명과 제사장적 사명과 선지자적 사명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항상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충성
이런 사명을 감당할 때 중요한 것이 "충성(πιστόν)"입니다. 이 충성(πιστός)은 "믿을만한, 신실한(trustworthy, faithful, believing)"이란 뜻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충성스럽게 보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충성해야 할 대상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교역자는 자기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양떼에게 충성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과 양떼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양떼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13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이 주님께 충성스럽게 여겨진 것은 바울이 충성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바울이 보인 모습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충성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바울을 우리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바울이 불신앙 안에서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은 바울에게 은혜를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14절).
은혜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은 바울은 우리 주님께 충성스럽게 여겨졌습니다(12절).
교역자는 자기 자신을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돌아보고 그런 죄인인 나에게 주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교역자로서 살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의롭다, 스스로 충성스럽다, 이렇게 자기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종교의 일을 행하면서 마치 하나님과 친하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전의 모습은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는 것을 항상 기억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 교역자는 자기가 스스로 의로워서 또는 충성스러워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은혜로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삼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의 겸손이 15절에 잘 드러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미쁘다"라고 합니다. 정말 믿을만 하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 말씀대로 바로 자기 자신, 죄인 중에 우두머리 죄인, 가장 악한 죄인인 자기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가 심각한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죄인 중의 첫 번째(πρῶτός), 즉 가장 죄인인 자기가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선포입니다. 자기 같은 큰 죄인도 구원을 얻었으니 다른 사람들, 자기보다는 악하지 않은 죄인들은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것은 교역자가 가져야 하는 마인드입니다. 교역자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더욱 깊이 깨닫습니다. 그렇게 되어 어떤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 인식은 내가 여기 있는 그 어떤 누구보다 죄인이라는 인식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얻었는데 여러분은 더욱 확실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을 입은 까닭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기가 긍휼을 입은 까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을 꼽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 자기가 긍휼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 즉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긍휼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긍휼을 입은 목적을 말씀합니다. 그 목적은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즉 바울을 보라, 그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를 보라, 우리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저렇게 풍성한데 무엇을 주저하느냐, 우리 주 예수님을 믿으라, 믿고 영생을 얻으라, 이렇게 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역자에게는 확실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인식은 바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었다는 인식입니다. 교역자는 자기가 멸망 받아 마땅했으나 예수님께서 오래 참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성도를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도 구원하시리라는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나도 구원해 주셨는데 저 사람도 구원해 주시리라 소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을 가진 교역자는 성도들의 본이 됩니다. 우리도 저 목사님처럼 예수님을 믿자,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과 영광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영생을 생각하면서(16절) 영원하신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썩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홀로 하나이신 분이십니다. 높임을 받으시기 합당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높임과 영광을 받으시는데 그것을 영원히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이 안에 우리의 영생이 의미가 있습니다.
교역자는 자기 인생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을 돌리는 것에 있습니다. 이 목적으로 성도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바로 교역자입니다.
착한 양심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기가 먼저 체험한 복음 진리를 기록한 다음에 내가 너에게 이 교훈을 부탁한다고 하면서 아들 디모데를 부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위에서 열거한 모든 내용은 디모데가 잊지 말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교역자로서 꼭 기억하고 따라야할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계속 교역자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바울은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권면합니다(18절). 여기서 "너를 지도한 예언"은 디모데가 교역자로 세워질 때 사도가 그에게 안수하면서 준 하나님의 말씀(4:14)입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28쪽). 디모데는 이 말씀에 의지해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싸우다라는 말과 싸움이라는 말은 동족어입니다. 이 말은 "전쟁"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군인처럼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수행할 때에 가장 강력한 도구는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
바울은 전쟁을 수행할 때에 가져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과 착한 양심"입니다. 전쟁을 수행하는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교역자가 선한 싸움, 즉 영적 전쟁을 수행할 때에 믿음을 잃으면 안 됩니다. 교역자는 성 삼위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으면 백전백패입니다. 문제는 자기를 믿고 싸우는 겁없는 교역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를 믿고 자기 언변을 믿고 자기 외모를 믿고 자기 권력을 믿고 심지어 자기 돈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사람 수준의 것입니다. 훅 불면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는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것인지를 교역자는 깊이 알아야 합니다.
교역자가 그 다음에 가져야 하는 것은 "착한 양심"입니다. 여기서 양심(συνείδησις)은 헬라어 원어로 함께 안다[syneídēsis (from 4862 /sýn, "together with" and 1492 /eídō "to know, see")]는 뜻입니다. 근래에 보면 양심을 거스르는 교역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교역자들은 자기가 한 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습니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거짓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렇게 한다는 것을 다른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병폐입니다. "양심"은 함께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다들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부인합니다. 이것은 착한 양심이 아니고 악한 양심입니다.
연약한 사람
그런데 사람은 누구든지 이렇게 악한 양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한 양심을 가지는 이유는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더 깊이 들어가서 설명하자면 사람이 악한 양심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연약한 자기를 믿기 때문에 악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힘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리라 믿는 사람은 자기를 스스로 변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상황을 변화시키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리수를 두지도 않습니다. 그저 믿고 묵묵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그러면서 성령님께서 자기 자신의 죄를 책망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신자의 양심을 통해서 죄를 책망하십니다. 그 때 믿는 교역자는 겸손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돌이켜서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자기의 무능력을 인정합니다.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믿음이 새로워지고 눈이 밝아집니다. 분별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주석, 529쪽).
여기 말한 "착한 양심"은 '성령으로 거듭난 양심'을 가리킨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라 하더라도 그가 양심의 소리를 계속 억압하면 마침내 그 양심이 마비되어 그의 믿음은 파선됨과 같이 타락한다.
믿지 않는 교역자
바울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가리켜서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평신도가 아닙니다. 이들은 교사들입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선생들인 것입니다(3절, 7절). 그러므로 이들은 교역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교역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데 불신자입니다. 양심이 마비되고 믿음이 파선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19-20절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이들은 양심을 버린 자로서 가르칩니다. 즉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르칩니다. 은혜를 가르쳐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지 않고 율법을 잘못 가르침으로 자기에게 속박시켜 버립니다. 신자의 자유를 빼앗습니다. 또한 이들은 신성 모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마치 우상신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탄의 짓을 하는 교역자
바울은 이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한 짓이 사탄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는 짓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자기들이 한 짓이 사탄의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사탄에게 내준 것"을 가리켜서 고린도전서 5장 5절을 가지고 "출교"를 의미한다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29쪽). 이 조치는 그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징계를 받음(παιδεύω)으로 고쳐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양심의 예
개혁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알미니우스는 로마서 7장 14절에 대한 설교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자로 고발을 당했습니다. 고발을 당한 후에 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그 외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들에 위배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러나 그 서약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교수였던 그는 학생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 양심을 저버리고 서약을 깨뜨렸습니다. 예정에 대해서 반대하고 칼빈주의 원리를 손상시켰습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달랐고 약속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양심입니다. 이 시대에도 이런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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