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4. 07:3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전서
목차
디모데전서 2:8-15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선한 싸움과 기도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기도를 권했습니다(2:1). 즉 기도는 선한 싸움(1:18)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2:1).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2:2). 왜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냐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2:4).
거룩한 손을 들어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8절은 "내가 원한다(Βούλομαι)"로 시작합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이 중요한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합니다. "내가 원한다" 뒤에 나오는 말이 "그러므로(οὖν)"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2:7). 바울에게는 합법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바로 복음 진리를 선포할 권위, 이방인을 가르칠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보내셨다는 것을 근거로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원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원한다
"내가 원한다(Βούλομαι)"는 말은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계속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남자들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장소에서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것보다 먼저 기도하기를 권했습니다. 그것처럼 지금 여기에서도 남자들이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손
그런데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6쪽).
"거룩한 손" 욥 16:17은 말하기를,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라고 한다. 버틀러(Buttler)는 말하기를, "기도는 고요한 마음의 산물이라"(Prayer is the issue of a quiest mind)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노기(怒氣)를 품고 기도하는 것은 전쟁하는 중에 명상(瞑想)하는 것과 같다"(He that prayes to God with an angry, trobled, discomposed spirit is like ont that retires into a battle to meditate)라고 하였다.
바울은 "거룩한 손"이 어떤 손인가를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그는 거룩한 손은 분노와 다툼에서 떨어져 있는 손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6쪽).
"분노와 다툼이 없이" 이 말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 예배의 원리를 여기서도 요약적으로 지적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끼리 "분노함과 다툼"은 하나님을 사귀는 일에도 큰 지장을 주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라고 하셨다. 요일 4:20에는 말하기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사 1:15 참조.
이렇게 볼 때 8절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말씀은 공식 예배 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공식 예배 때 기도할 때에는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손은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은 손입니다. 분노와 다툼을 일으키지 않은 손입니다. 사랑과 평안을 전하는 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전하는 손입니다.
8절을 묵상하면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교역자로서 교회 안에서 억울하게 하는 일들을 많이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다툼이 있으면서 예배를 인도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라고 깨끗하겠습니까? 모든 남자들이, 특별히 교역자들이 거룩한 손, 즉 포학이 없고 정결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예배를 소망합니다. 기도해야겠습니다.
여자들도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바울은 여자들에게도 권면합니다. 특별히 9절은 "이와같이(Ὡσαύτως)"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주의해야 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옷차림
여자들이 주의할 것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옷차림입니다. 바울은 단정하게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단정하게 옷을 입으라고 하는 말은 수수하되 잘 갖추어서(κόσμιος) 옷을 입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원어로 코스미오스(κόσμιος)인데 세계를 뜻하는 코스모스(κόσμος)와 연관된 말입니다. 코스모스는 잘 정돈된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여자의 옷차림이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잘 정돈하셨듯이 여자들은 자기 옷차림을 잘 정돈하고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소박함과 정절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소박함과 정절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7쪽).
"소박함"이란 말(αἰδώς)은 수줍어하는 성품(shame, modesty)이니, 여성의 귀중한 도덕이다. "정절"이란 말(σωφροσύνη)은 모든 격동하는 정욕이나 혈기를 억제함이다. 그러므로 엘리콧트는 말하기를, "여기 '정절'이란 것은 극기(克己)의 습관을 세워 인격의 도덕적 균형을 유지함"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건전한 마음"(혹은 깨어 있는 마음)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설명은 원어를 잘 반영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잘 배운 여성은 이렇게 하겠지만 초신자는 이렇게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그를 정죄하기 보다는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가 말씀으로 잘 양육을 받아서 그 마음이 행실로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시간을 여유있게 또 인내하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으로 꾸며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여자가 자기를 꾸미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자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것은 소박함과 정절, 즉 "수줍어하는 성품과 건전한 마음"입니다. 여자는 "수줍어하는 성품과 건전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장식은 여자를 참으로 아름답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장식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킵니다. 그것은 땋은 머리와 금과 진주와 값진 옷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7쪽).
여기 "금이나 진주"는 "땋은 머리"란 말과 동반된 것이다. 바울 시대의 조각품(彫刻品)이나 문헌에 의하면, 당시의 고급 매춘부들은 머리카락을 탑과 같이 땋아 올렸고, 거기에 보석이나 금이나 진주로 단장하였다고 한다(J. B. Hurley, Man and Woman in Biblical Perspective, 1981, p. 199). 이 문구가 가르치는 뜻은, 부녀의 단장하는 것을 일률적으로 금함이 아니다. 이것은 아름다움을 숭상하되 지나치게 함을 금하는 말이다.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 말도 역시 사치품을 과도히 사용함을 금함이다.
이 말씀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함의하는 바가 큽니다. 현대는 SNS가 발달한 시대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SNS를 보고 그가 어떤 것으로 자기 자신을 꾸미고 있는지를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교회에 아무리 소박하게 온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치와 허영을 그의 SNS로 다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것이 예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한 그 말의 뜻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0절은 "오직(ἀλλά)"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그러나"라는 뜻입니다. 9절에는 아닌 것이 나왔습니다.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은 아닌 것입니다. 이제 10절에는 그것은 아니고 이것이 맞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이 나옵니다. 맞는 것은,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기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딱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선행"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선행은 두 단어로 이루어진 말인데 "선한 일들(ἔργων ἀγαθῶν)"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선행이 먼저 나오지만 원어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이 선한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여자에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이 붙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자도 똑같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자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 그것은 "포학한 손"으로 나타납니다. 분노와 억울함과 다툼을 일으키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자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에는 외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바르게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딱 맞는다는 말은 남자와 여자에게 공히 하는 말입니다.
조용히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바울은 여자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태도로 조용한 가운데 배우라고 합니다. 조용하라고 해서 예배 때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38쪽).
여기서 "조용히"란 말(ἐν ἡσυχίᾳ)은 침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전 11:5을 보면, 여자들도 공예배 때에 기도도 하였고 장래 일을 예고하는(행 21:9) 예언도 하였다. "조용히"란 말에 "침묵"의 뜻이 있으나, '평화와 안식'의 의미도 포함된다. 여기 부녀의 세 가지 덕을 말하였으니 곧, "순종", "조용", "배움"이다. 부녀는 일반적으로 주장할 자가 아니라 순종할 자며, 소동할 자가 아니라 안정할 자며, 또한 남자들을 가르칠 자가 아니라 배울 자이다. 고전 14:31-36 참조.
여자가 전면에 나서는 것의 위험성
이것은 일반 원리입니다. 하지만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구약 시대에도 그렇고 신약 시대에도 여자들이 가르치고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적용할 때에는 일괄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여자가 전면으로 나섰을 때에 위험성이 있다는 측면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 뉘앙스가 12절 이하에 나옵니다.
위험한 이유 두 가지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사도 바울은 여자가 전면에 나서서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먼저 창조의 원리를 가져와서 설명합니다. 창조의 순서상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 동산의 청지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또한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과 맺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말씀을 하와에게 부지런히 가르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창조의 원리가 어그러졌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듣고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나서서 지도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 두 번째는 타락입니다. 물론 타락의 책임은 아담에게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담이 하와를 가르치고 보호했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인류 타락의 책임이 아담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롬 5:12-14). 인류에게 사망이 이르게 한 책임은 아담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여자가 나서는 것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와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와의 말을 듣는 것의 위험성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12절). 그것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금 사회나 교회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일리가 있습니다.
구원과 해산함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15절은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σωθήσεται)"로 시작합니다. 문법적으로 보자면 수동태입니다. 곧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구원한다라는 이 말(σῴζω)은 위험에서 구출한다, 고친다, 보존한다(I save, heal, preserve, rescue)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죄에 빠졌음이라"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의 논조는 여자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나서는 것이 위험하긴 하지만 그것이 여자의 구원을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과 연관되어 나오는 말이 해산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이라는 징계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와가 범한 잘못에 상응한 벌입니다. 그런데 이 벌은 소망이 있는 벌입니다. 왜냐하면 하와에게서 난 남자 중에서 구원자, 메시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고통 중에 구원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산은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여자의 해산
그러면 이미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여자의 해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메시아가 이미 오신 지금의 해산은 경건한 자손을 생산하는 의미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손의 수를 채우시고 계십니다. 그 수가 다 채워지면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해산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도 연관됩니다. 천국의 극치를 이루는 것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징계면서 동시에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여자의 숭고한 직임이고 책임입니다.
해산에 있어서 여자는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있어야 하고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숙함"은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해석하면 건전한 정신(σωφροσύνης)이라는 말입니다. 즉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서 살며 해산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해산은 경건한 자손을 얻는 것과 깊이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자손은 경건한 어머니, 즉 건전한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거하는 어머니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디모데가 그런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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