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디모데전서 3장 1-7절 | 감독(장로)의 자격 요건

2024. 11. 5. 06:00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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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3:1-7

찬송가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감독의 직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 직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모든 것 중에서 첫 번째로 권한 것은 기도입니다(2:1). 그 다음으로 예배 때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하고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쳤습니다(2:8-15). 그 다음으로 가르치는 내용은 감독의 직분에 대한 것입니다(1절). 

선한 일을 사모함

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3장 1절은 "미쁘다(Πιστὸς)"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믿을만 하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말이 믿을만 한데 그 말은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고 한다면 선한 일을 그가 사모하고 있다는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감독이라는 말(ἐπισκοπή)은 문자적으로 위에서 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어떤 일을 할 때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감독과 장로

이 감독이라는 직분은 교회에서 장로직과 같은 직분입니다. 장로는 세워진 사람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반면 감독은 그런 지혜 있는 사람이 일을 잘 다스리고 감독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감독과 장로, 둘 다 같은 직분을 말함인데 그 직분이 가진 각각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경우에 맞게 쓰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1쪽). 

성경은 "감독"을 "장로" 이상으로 세우지 않는다.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분인데 그 명칭만 다르게 불리운 것뿐이다. 모든 장로(치리장로와 교훈장로 곧, 목사)들은 교회를 가르치며 치리하되 지배자의 심리로 할 것이 아니라 봉사자(하나님의 말씀에 수종드는 자)로 겸손하게 실행해야 된다(고후 4:5). 그들도 평교인과 마찬가지로 일반 제사장일뿐(벧전 2:9) 대제사장은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되시는 대제사장은 예수님뿐이다(히 4:14). 그러므로 목사직이나 장로직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그 직분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잘못된 교회 정치가로 전락된다. 

직분은 일을 위한 것임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선한 일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감독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선한 일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직분은 지위가 아닙니다. 직분은 일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별히 감독의 직분은 "선한 일(καλοῦ καλοῦ)"을 이루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감독의 직분과 선한 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직분자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선한 일을 얼마나 열렬히 사모하고(ἐπιθυμέω) 있는가? 만약 선한 일에 대한 사모함이 없고 직분 자체를 바란다면 그에게는 그 직분이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치리 장로나 교훈 장로 즉 목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감독의 첫 번째 요건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란 말은 죄가 전혀 없는 신분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거리끼는 죄책이 없음을 가리킨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1쪽). "책망할 것이 없으며" 이 말은 원어로 한 단어입니다. 이 말(ἀνεπίληπτος)을 분해하면 부정을 의미하는 알파()와 꽉 잡는다라는 말을 뜻하는 에피람바노마이(ἐπιλαμβάνομαι)가 합성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원어를 살려서 번역하자면 꼬투리 잡을 것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꼬투리 잡을 것이 없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찾으면 무엇이든 걸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사람들 다수가 생각하기에 저런 흠결은 안 되겠다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이 맞습니다. 즉 이 말은 "사회적으로 거리끼는 죄책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끼는 죄책은 일반 사람 다수가 보기에 저런 흠결은 안 되겠다고 하는 죄책인 것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또한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아내가 두 명 이상이 있거나 음행을 하는 사람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음행은 우상 숭배와 연관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지도자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4절). 

다섯 가지 요건

이어지는 요건은 다섯 가지인데, "절제하는, 신중한, 단정한, 대접하는, 잘 가르치는"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각각 한 단어로 쓰였습니다. 먼저 절제하는(νηφαλέος)은 술에 취하지 않고 정신이 온전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떤 것에 중독되거나 정신이 팔려 있지 않고 온전한 정신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 요건이 중요한 이유는 교역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 가지 사안을 온전한 정신으로 바라보고 처리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운전할 때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것처럼 교회를 치리할 때에는 온전한 정신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신중한(σώφρων)은 내면과 연관된 말입니다. 이 말은 마음이 고요하고 잔잔해서 잘 균형이 잡힌 상태를 가리킵니다. 교역자나 장로가 내리는 결정은 이렇게 고요하고 잔잔한 가운데 균형이 잘 잡힌 상태의 정신에서 내리는 결정이 되어야 합니다. 불안해서, 또는 두려워서 내리는 결정은 교회에 해가 됩니다.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내리는 결정이니만큼 불안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이 높거냐 매사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장로나 교역자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단정한(κόσμιος)은 2장에서 여자의 옷차림에 나왔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꼭 여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교역자와 장로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세계"를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 말인데, 특별히 세계가 질서 있게 이루어진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는 모든 면에서 질서가 잘 잡혀있습니다. 이처럼 교역자와 장로는 외면으로나 내면으로나 질서가 잘 잡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질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세워집니다. 

 

대접하는(φιλόξενος)은 문자적으로 낯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는 나그네를 대접한다고 잘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3쪽). 

바울 당시에 핍박으로 인하여 의지할 곳이 없어 유리하는 신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에 대한 대우 문제는 초대 교회의 당면 문제였다. 이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교역자의 가정 사정에 달려있다. 곧, 교역자의 아내된 자가 이 일에 협력하지 않으면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혼자 가정을 경유하지 않고 별도의 구제방법을 통하여 할 수도 있다. 고대의 감독들 중에는 이 말을 여자적(如字的)으로 실행한 자가 많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친히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병자와 나그네들을 대접하였다. 

 

잘 가르치는(διδακτικός)은 말 그대로 가르치는 것을 잘 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칼빈은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은 교역을 하지 말고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교역자는 그 별명이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맡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 가르치려면, 1) 지식이 있어야 한다. 지식을 무시하는 교역자들이 교계에 많으니, 그런 사람은 알지 못하여 그리한다. 성경을 번역한 학자들은 모든 유력한 전도자들보다 못하지 않은 큰 일을 하였다. 그들이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으랴? 교역자는 그 자신이 먼저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옛날 동양의 어떤 학자는 글 읽기를 너무 원하여 등불이 없는 때에 반딧불과 눈(雪)빛에 책을 비추어 보면서까지 독서했다고 한다. 2) 아는 것을 잘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시인(詩人)은 천재로 되는 것이나 웅변은 인력으로 될 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데모스데네스(Demosdenes)는 천품적으로 언재(言才)가 없었으나 해변의 파도 소리 높은 곳에서 웅변을 연습하여 웅변가가 되었다. 3) 감화(感化)가 있어야 잘 가르친다. 감화란 것은 기도와 덕행이 있는 인격에서 나타난다. 

 

박윤선 목사님이 말씀한 세 가지는 교역자라면 꼭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들입니다. 첫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즉 교역자는 무엇보다 다독가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아는 것을 잘 표현해야 합니다. 즉 교역자는 웅변가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감화가 있어야 합니다. 즉 교역자는 기도와 덕행이 있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감화는 감정을 조종하는 언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겸손과 덕행이 있는 진실된 인격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교역자는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술은 절제하거나 신중하거나 단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하는 교역자에게 우상이 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4쪽). 

구타하지 아니하며(μὴ πλήκτην)라는 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4쪽). 

"구타하지 아니하며"란 말을 가리켜 크리소스톰은 해석하기를, 언사(言辭)로써 남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손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함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사람마다 혈기가 있는데 그것을 억제하지 못하여 잠시라도 놓아 두면, 남을 손으로 치는 죄에 빠지기 쉽다. 교역자는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가운데 상심할 일도 당하게 되므로 이 점에 있어서도 특별히 주의해야 된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이 맞지만 교역자가 남을 가르치는 직분, 즉 말을 하는 직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크리소스톰의 해석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역자는 강단에서 말로 다른 사람을 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는 강단을 자기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즉 남을 치는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관용하며

관용하며(ἐπιεικής)는 어떤 딱딱한 규정을 들이대지 않고 그 규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특별히 관용은 다른 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합니다. 그런데 "관용하며"는 그 반대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대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용은 무턱대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율법을 지킬 때 그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박윤선 목사님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선교사님을 환송하기 위해서 주일에 택시를 타고 그 선교사의 배에 올라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관용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일을 걸고 넘어졌습니다.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님은 율법의 정신을 잘 지킨 것이었습니다. 교역자는 이런 것들에 있어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투지 아니하며

다투지 아니하며(ἄμαχος)는 원어로 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싸움이라는 말 앞에 부정어가 붙은 말입니다. 즉 싸움을 피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4쪽). 

"다투지 아니하며"란 말의 헬라 원어(ἄμαχος)는 더욱 강한 뜻을 가졌으니 그것은 다투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데, 어떤 다툼이든지 성품상으로 싫어하는 자를 가리킨다(Bouma).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ἀφιλάργυρος)는 경제적인 이득을 바라는 마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돈이 자꾸 불어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한 욕구입니다. 그런데 이 욕구를 점점 부자되는 것을 우선시하면서 채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성장은 꼭 부해지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부해지는 것은 성장 중에서 극히 일부분입니다. 진짜 성장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자라는 것이 진짜 성장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풍성해지고 하나님을 점점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된 성장입니다. 이런 성장을 바라는 사람은 경제적인 이익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교역자나 장로는 물질 문제에 있어서 결백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5쪽). 

칼빈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부자되기를 원하면 결국 빨리 그렇게 되려 하고, 따라서 불의한 취리(取利)를 하게 된다"고 하였다. 딤전 6:10 참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교역자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결과는 자녀들이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모든 공손함(πάσης σεμνότητος)은 윗 사람을 깊이 존중한다라는 뜻입니다. 교역자가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고 잘 양육하였기 때문에 자녀가 교역자를 깊이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은 복종하는 태도(ἐν ὑποταγῇ)를 가집니다. 이 말은 아래에 있는 태도를 뜻합니다. 즉 아버지의 권위 아래에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는 아버지가 참된 권위를 행사함으로 생깁니다. 즉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고 아버지와 자녀가 소통이 잘 된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자녀가 무슨 일이든지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가르침이 맞다고 인정합니다. 이런 데에서 자녀의 복종하는 태도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이 말씀에 대해서는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으로 대신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5쪽). 

이것은 감독을 택하는 때에 그의 가정 사정에 대하여 고려할 말씀이고, 이미 임직을 받은 자의 자식이 후에 패역하게 되는 때에 그 임직자가 정직(停職)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같은 경우에 감독은 사직하거나 정직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은 없다. 사람이 사람을 바로 만드는 데 절대적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특별히 장성한 자녀들은 자유인이고 독립인이니 부모가 효과적으로 간섭할 수 없다. 구약시대에도 성직자의 자녀가 범죄하였을 때에 그는 직무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성직자의 자녀가 불량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사직(辭職)한 자처럼 근신하는 태도로 겸손히 처신해야 된다는 것이다. 

새로 입교한 자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새로 입교한 사람은 교역자나 장로로 세우기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 입교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적을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그가 맡은 직분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맡는다는 것은 실로 막중한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야 하고 그 직분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교역자, 또는 장로, 감독으로 부르실 때 그 직분을 마다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처음에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자의로 그 직분을 취하였지만 나중에 그 직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고는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하며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아타나시우스와 에브라임과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도 감독의 직분을 원치 않았고 피하려고 했다고 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6쪽). 

 

새로 입교한 사람은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46쪽). 

그 의미는, "새로 입교한 자"는 아직 믿음이 유치하기 때문에 성직을 받은 후 교만해져서 실수하기 쉬우니, 그렇게 되는 때에는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마귀의 무리)의 훼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외인에게서도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7절의 말씀은 중요합니다. 7절의 "외인"은 불신자를 뜻합니다. 즉, 감독의 직분을 맡은 사람, 교역자나 장로는 불신자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장로를 세울 때에는 그 사람 주변 사람, 특히 불신자들의 평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불신자들도 일반 은총 아래에서 양심이 있고 선악을 판단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나름의 도덕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교역자나 장로가 그 사람들의 기준도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비방을 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가 비방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귀의 올무"에 빠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사람을 세울 때에는 이런 것에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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