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디모데전서 4장 1-16절 | 교역자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2024. 11. 7. 07:00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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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디모데전서 4:1-16

    찬송가 595장 나 맡은 본분은


    교회는 중요성

    바울은 3장 마지막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목적을 설명합니다. 그 목적은 디모데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입니다(3:15). 즉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치리하고 돌보고 양육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굉장히 중요한 기관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입니다(3:15 하). 이 진리는 경건의 비밀이라고 불리는데 복음 진리를 가리킵니다(3:16). 이 경건의 비밀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3:16). 이렇게 설명한 바울은 4장을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로 기능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는 일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1절). 

    성령님의 말씀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바울은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말씀으로 지도하시고 양육하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라고 하신 것은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요 굳게 세우고 잘 대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미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미혹하는 영은 불명확한 것을 명확하지 않게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혼동을 줍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밝히 말씀하십니다.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때에도 한 번 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지도는 명확하고 확실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토록 명확한 성령님의 가르침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이 각자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기 때문입니다(약 1:14). 자기 욕심이 있으니까 성령님의 가르침을 자꾸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엡 4:30).

    미혹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들

    성령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미혹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들을 따르면서 그 믿음에서 떠날 것이라(ἀποστήσονταί)"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로는 "따르리라"라고 해서 이것이 주동사인 것처럼 번역을 해 놓았는데 주동사는 "떠날 것이다"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미혹하는 영들(πνεύμασιν πλάνοις)입니다. 미혹하는 영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라는 것입니다. 미혹은 속는 것입니다. 속아서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미혹은 한 가지가 아니고 굉장히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한 분이십니다. 믿음도 하나요 진리도 하나입니다. 

     

    둘째로는 귀신들의 가르침들(διδασκαλίαις δαιμονίων)입니다. 이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지만 거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비슷하게 가르친다고 해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왜 미혹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들에 취약할까요? 사람이 이것들에 취약한 이유는 귀가 가렵기 때문입니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신비를 날마다 묵상하고 그 뜻을 연구하고 깨닫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신비

    복음은 참으로 신비입니다. 경건의 비밀, 즉 경건의 신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신비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실 수 있으신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당하실 수 있으신가, 그 고난의 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어떤 의미이고 부활은 또 어떤 의미인가, 승천은 또 무슨 뜻인가, 이렇게 예수님만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비한 것들이 많은 것입니다. 복음 진리는 이렇게 놀라운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궁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복음을 궁구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있어서 게을러 집니다.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상한 소리, 새로운 소리가 귀에 솔깃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와가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이유입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

    바울은 이런 사람을 자기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이라고 합니다(2절). 화인(καυτηριάζω)은 것은 노예나 가축이 맞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인생에 대한 인생관이 없고 인생의 목적이 없으며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예나 가축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있으니 그 사람은 양심에 화인을 맞은 것이 맞습니다.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죄가 시키는 대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선생인척 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외식함(ὑπόκρισις)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someone acting under a mask)"라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 진리를 모르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복음 진리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 머리 속에 어떤 공식처럼 암기하고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꾸 강단에서 복음에 위배되는 설교를 합니다. 그건 설교가 아닙니다. 위선이고 외식입니다.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양심에 화인 맞은 것 같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 핸드릭슨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56쪽). 

    핸드릭슨은 사람의 양심이 화인 맞은 것같이 되는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거짓말을 계속하므로 성령으로 근심하시도록 함. 2) 성령을 반대함. 3) 성령으로 하여금 떠나시게 함. 4) 성령을 거스려 반역함. 5) 따라서 양심의 기능은 어두워지고 굳어지게 된다. 이것이 양심의 화인 맞음이다.

    양심의 특질은 진실인데, 이단자들의 양심은 화인 맞은 듯이 지울 수 없게 외식과 거짓으로 물들어 있어서 언제나 거짓으로 나타난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양심에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 무엇을 가르치는지가 3절에 나옵니다. 그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56쪽). 

    이 말은 이단자들의 그릇된 교훈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그 교훈은 두 가지 방면으로 가증한 것이다. 1) 혼인과 식물은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것인데, 그들이 이것을 배척하니 큰 교만이고, 2) 그들이 진정한 성결(聖潔)을 떠나서 다만 외형적인 금욕주의(禁慾主義)에 의하여 성결한 듯한 가면(假面)을 쓰니 이것은 기만(欺瞞)이다. 

     

    이들이 이러한 가르침은 복음 진리와은 아무 관계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지금도 복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가르침으로 강단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자꾸 어떤 실천적인 윤리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책하게 하며 그 말에 매이게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도록 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상을 왜곡시킵니다. 어떤 윤리적인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정죄하는 분으로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인을 제정하시고 음식물을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색하고 무서운 분이 아니고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무엇이 유익한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를 알고 점점 더 알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면서 자유해집니다.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믿음 생활을 하게 됩니다. 즉,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그렇게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성도들을 그 반대로 이끕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4절은 "이는(ὅτι)"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혼인과 음식물 등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선하다라는 말은 창세기 1장의 "좋았더라"와 상응합니다. 창세기 1장의 좋았더라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57쪽).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만물 창조의 기사를 염두에 둔 것이다. 거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씀이 창조 사건마다 따라 나온다(1:4, 10, 12, 18, 21, 25, 31). 여기 "좋았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טוֹב)는 '선하다'는 뜻이다. 바울 시대에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를 따르던 자들은 물질개악설(物質皆惡說, 모든 물질이 악하다는 주장)을 주장한 것이다. 즉, 물질은 모두 악하다고 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1장 말씀과 반대된다. 바울도 현저히 물질개악설을 반대하였다. 골 2:21-23 참조. 

    말씀과 기도

    5절은 "거룩해지고 있느니라(ἁγιάζεται)"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말씀의 부연입니다. 그러면서 왜냐하면(γὰρ)이 나옵니다. 어떻게 해서 거룩해지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만물을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즉, 말씀에 의거해서 그 사용처와 사용하는 방법을 주의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은 기도를 통과해서 사용합니다. 여기 나오는 기도(ἔντευξις)는 2장 1절에서 "도고"라고 나온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개입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ntervention led by God, marking intersection between heaven and earth as it reflects the Lord's specific will).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아주 중요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것을 금하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사용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뜻하시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냐, 그 뜻이 어떤 것이냐,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에서 거룩함이 나오는 것이지 기계적으로 어떤 것을 금하고 권하고 하는 것에거 거룩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자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신자들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자기들을 따르도록 이끕니다. 

    형제를 깨우치면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6절에 나오는 "네가"는 디모데를 가리킵니다. 디모데는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쳐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교훈의 잘못을 드러내고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진짜 거룩이냐 하는 것에 있어서 거짓 교사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전하여 형제를 깨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 나온 예는 거짓 가르침의 일부분입니다. 1절에 나온 대로 이런 가르침은 정말 많고 다양합니다. 미혹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들을 잘 구분해서 그것의 거짓됨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역자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일하는 교역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입니다. 성도들을 깨우쳐서 그들의 사상체계을 바르게 세우고 그들이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잘 구분하게 하면 교역자는 자기의 할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상체계를 세운다고 했는데 깨우치면(ὑποτίθημι)이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이 말은 성도가 믿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따라야하는 어떤 긍정적인 패턴, 패러다임을 잘 놓아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양육을 받으리라"는 '양육을 받으면서'라고 번역되어야 맞습니다. 이 양육을 받는다는 말(ἐντρέφω)은 어떤 기술이나 실제적 지식에 있어서 끊임없는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이 동사의 시제에서도 드러납니다. 현재형 분사가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계속의 의미입니다. 

     

    그러한 끊임없는 교훈과 가르침을 받는 도구는 말씀들(τοῖς λόγοις)입니다. 이 말씀들이 무엇이냐 할 때 첫째, 믿음의 말씀들이고 둘째, 선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이 말씀들에 바짝 붙어서 따라가고 있습니다(παρηκολούθηκας). 이렇게 볼 때 교역자는 말씀을 연구할 때에 믿음으로 연구해야 하고 말씀이 선한 교훈인 줄 알아야 하고 그 말씀에 바짝 붙어서 동행해야 합니다. 교역자가 그렇게 하는 것과 동시에 그 말씀들은 기술이나 실제적 지식에 있어서 교역자에게 끊임없는 교훈을 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역자는 형제를 더욱 잘 깨우칠 수 있게 됩니다.

     

    6절의 주동사는 "너는 될 것이다"입니다. 즉 "너는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될 것이다" 이것이 주동사입니다.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형제를 잘 깨우치는 교역자는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갑니다(미래).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마 25:21, 23).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παραιτέομαι)고 합니다. 이 신화에 대해서는 1장 4절에서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교역자는 하나님 말씀에는 바짝 붙어서 동행해야 하지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거절해야 합니다. 멀리해야 합니다. 그것을 거절하고 멀리하면서 교역자는 경건을 향하여서(πρὸς εὐσέβειαν) 자기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γυμνάζω). 연단하다라는 말은 경기장을 뜻하는 김나지움(gymnasium)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즉 체육 선수가 올림픽 경기에 나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단련하듯이 경건을 향해서 단련하라는 뜻입니다. 경건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을 쳐서 복종하게 하면서 단련함으로 그것을 지향해야(πρὸς) 하는 것입니다. 

     

    연단이라는 말은 원래 육체의 연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것을 가져와서 경건을 향하여 연단하라고 했는데 육체의 연단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바울은 육체의 연단도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유익은 작은 것입니다. 반면 경건에 이르도록 애쓰는 연단은 범사, 즉 모든 것에 있어서 유익합니다. 이 연단은 지금의 생애와 앞으로 다가올 생애에 있어서 약속이 있도록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59쪽). 

    복음을 믿어 경건하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유익을 얻는다. 그 유익이란 것은 물질의 부요를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생활이다(딤전 6:6-10). 시 23:1 참조. 그러나 그는 내세에 들어가 더 큰 축복을 누린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의 연습(신체의 연단)과 경건생활(영적 연단)을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대조시켰다. 즉, 운동이나 경기로 할 수 있는 육체의 연습은 적은 유익을 가져오는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할 수 있는 경건생활은 무엇에든지 유익하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대다수는 이 진리의 사실성을 보지 못하므로 그들은 경건의 중요성을 모른다. 그들은 영적 소경이다. 

     

    우리는 운동이 얼마나 유익한지 알고 있습니다. 운동을 하면 일상 생활에서 활력이 넘칩니다. 생명력이 더욱 활발해지고 살아납니다. 건강을 증진 시킵니다. 이런 운동의 유익을 생각할 때 육체의 연습의 유익이라는 것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경건의 연습은 얼마나 더 유익할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유익한 운동을 가리켜서 그것은 경건의 연습과 비교하면 아주 약간의 유익일 뿐이라는 말씀은 경건의 연습이 주는 놀라운 유익을 경험하도록 부추깁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건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것은 정말 믿을만 한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한 말인 것입니다(9절).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우리가 계속(현재시제) 수고하고 힘쓰고 있다고 합니다. 수고한다(κοπιάω)는 말은 몸이 지쳐서 나가 떨어질 정도로 힘든 노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힘쓴다(ἀγωνίζομαι)는 말은 상을 얻기 위해서 분투함으로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을 향하여서 자기 자신을 단련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가르침을 바울은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완료시제)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모든 사람들, 특별히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한 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신식 이야기에 둘 것이 아닙니다. 허탄한 이야기나 망령된 신화에 둘 것도 아닙니다. 미혹하는 영들이나 귀신들의 가르침에 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잡다한 것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오직 살아 계시는 한 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에 수고하고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교역자가 마땅히 취해야 하는 태도입니다. 

    명하고 가르치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고 합니다. 즉 디모데가 먼저 교역자로서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하고 성도들도 그렇게 힘쓰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가르칠 때에는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가르쳐야합니다.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면서 가르쳐야 합니다(벧전 5:3). 

    본이 되어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교역자가 연소하다고 업신여김을 당하면 진리의 말씀과 경건에 힘쓰는 것을 잘 가르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해서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도 절대 유익하지 못합니다. 

     

    디모데는 연소하지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본이 되어야 하는 분야는 다섯 가지입니다. 그것은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입니다. 여기서 정절은 깨끗함인데 이 깨끗함은 절대적인 깨끗함이 아닙니다. 계속적인 회개 생활로 점점 거룩해지는 것을 뜻하는 깨끗함입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61쪽).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를 때까지"라고 합니다. 그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읽는 것이 가장 첫 번째로 나옵니다. 그만큼 교역자에게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교역자는 먼저 성경을 깊이 읽어야 합니다. 읽어서 그것을 체득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서적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교역자는 다독가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성경으로 진리의 기준이 잘 세워진 상태에서 다독을 함으로 여러 상황에 맞는 조언을 성도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권하는 것"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여기에서 권하는 것은 마치 성령님께서 보혜사로서 조언을 주시듯이 그렇게 성도들에게 말씀으로 알맞은 조언을 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뜻하는 바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교역자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안수 받을 때에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디모데는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14절). 즉 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65쪽). 

    디모데는 노회의 안수로 직분을 받았다. 바빙크는 말하기를, "직분을 줄 때에 안수함이 그리스도의 명령은 아니니, 그것이 임직에 관한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귀중한 예식이라고 함이 개혁신학의 의견이다. (교회시대에) 이 예식을 행함으로만 직은(職恩)이 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내부적으로 부름 받은 자에게 임직을 선언하는 예식은 된다. 내부적으로 부름받은 증거는 1)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재능과, 2) 교직자가 되려는 순결하고 강한 소원과, 3) 그 성직에 나아갈 길이 열림이다"라고 하였다. "안수"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내부적으로 부름 받은 자가 교회의 공선(公選)을 받은 후에 받는다. 개인이나 교직자들이 독재적으로 택하여 세운 자는 이것을 받지 못한다. 이 점에 대하여 교회 정치가 키프리안이 변증하였고, 칼빈도 역시 그리하였다. 그 피택자에게 안수하는 의미는 출 28:41; 29:9; 레 21:10에 밝힌 바와 같이 1) 그에게 직분을 맡김이고, 2) 그를 하나님께 봉헌(奉獻)함이고, 3)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는 증표이다. 그러므로 안수직을 받은 자는 교회의 택함을 입어 하나님께 헌납(獻納)된 자이므로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함께 거론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디모데가 직분을 받은 것이 선지자들의 예언적 지시로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칼빈이 그 해석을 따릅니다. 둘째는 이 "예언"이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에 바울이 기도한 내용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둘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하여튼 디모데는 안수 받은 것을 중히 여기고 교역해야 했습니다. 또한 안수 받을 때에 받은 기도도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라고 합니다. 전심 전력하라는 말은 열심히 생각하고 공부하라는 말(μελετάω)과 그 가운데 있으라는 말(εἰμί)을 번역한 말입니다. 교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또한 교역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신 말씀도 마음에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욱 나아집니다(προκοπή).

    교역자의 성숙함

    교역자가 나아지는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증거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역자와 함께 거하신다는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교역자가 점점 나아지지 못하면 교인들이 교역자에 대하여 단조와 권태를 느낀다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67쪽). 맞는 말씀입니다. 교역자는 스스로 돌아보아 어제보다 오늘이, 작년보다 올해, 더 나아졌는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행실에 있어서 거룩함에 있어서 더 자랐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교인들이 단조와 권태를 느낀다면 그 원인을 자기 자신의 정체와 퇴보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16절). 교역자는 살피고 나아지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 일을 계속하라" 그것은 교역자 자신과 교역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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