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마가복음 8장 1-13절 | 예수님께 붙어서 떠나지 않았던 사천 명의 이방인들과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

2024. 3. 1. 15:12성서유니온 매일성경/마가복음


마가복음 8:1-13

찬송가 424장 아버지여 나의 맘을


이방인으로 구성된 사천 명

복음은 이방으로 향했습니다. 두로 지방에 살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대답에는 복음이 이방으로 향하는 이유가 담겨 있었습니다(7:28-29).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안에 이방인들이 들어왔습니다(7:31; 마 15:31). 그 때 예수님께서는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8:1-10). 본문의 사천 명은 오병이어 기적의 오천 명과는 그 구성이 다릅니다. 이 사천 명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3절에 보면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멀리서 온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오실 때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일 것입니다(7:31).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입니다. 

먹을 것이 떨어졌는데도 예수님과 붙어서 떠나지 않음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2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이유는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큰 무리(1절)는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있었다는 말은 원어로 향하여 있다, 붙어있다(προσμένω)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면서도 예수님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계속 예수님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붙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육체적인 필요보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보낸다면 그들이 가다가 길에서 지쳐 쓰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무리를 먹이심

무리를 그냥 보내실 수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때처럼 무리를 먹이시려고 물으신 것입니다. 마침 떡이 일곱 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때와 똑같이 무리를 땅에 앉게 하시고(6절) 떡 일곱 개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또 작은 생선 두 마리도 나누어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7절). 훌륭한 식탁이 광야(4절)에 차려졌습니다. 그렇게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사천 명이나 되었습니다(9절).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이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8절). 이 일곱 광주리의 음식은 무리가 흩어져서 집으로 갈 때 그들의 손에 들려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길에서 지쳐서 쓰러지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일곱과 사천 명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숫자입니다. 무리를 먹이신 떡은 일곱입니다. 또한 남은 음식물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시간을 가리킬 때는 하나님을 만나는 주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일곱이라는 숫자가 어떤 것의 개수와 연관될 때는 전 세계 모든 족속을 뜻합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총 70개의 족속이 나옵니다. 이 70개의 족속은 땅의 모든 백성들을 가리킵니다(창 10:32). 교회가 형성되고 일곱 집사를 세우는데 그 이름들은 헬라식의 이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유대인이라도 그 출신은 이방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일곱은 온 땅 모든 족속을 가리키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사천 명이라는 숫자도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4는 사방을 나타내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천이라는 숫자 안에 그들이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함의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무리의 수가 비유적인 숫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도 사천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대해서 약한 근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매일성경 | 마가복음 8장 1-13절 | 예수님께 붙어서 떠나지 않았던 사천 명의 이방인들과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

반면 열둘을 하나님 백성의 숫자입니다. 오병이어 때에 남은 음식은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바구니는 약 20리터 정도를 담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그 무리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다윗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을 먹이고 남은 음식은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광주리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적어도 100리터 정도는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광주리는 바구보다 훨씬 큽니다. 그러므로 열두 바구니보다 일곱 광주리에 담긴 음식의 양이 훨씬 많았습니다. 일곱 광주리에 담긴 음식은 사천 명의 무리가 집으로 가는 동안에 그들의 배를 든든하게 해줄 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패턴

본문의 사건과 오병이어 사건의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 패턴입니다. 오병이어 때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6:34). 본문에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2절).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한 쪽은 영적인 필요를 채움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셨고 다른 한 쪽은 육적인 필요를 채움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무리를 흩어 보내십니다.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고 즉시 떠나셨습니다. 즉시 떠나신 이유는 각자의 삶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예수님

이 안에도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모든 필요를 예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영혼의 필요를 아뢸 수도 있고 육체의 필요를 아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함으로 고통 받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먹이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필요,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언제든지 예수님께 모이면 우리는 부족한 부분에 채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또는 자기 욕망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필요가 채워졌으면 바로 우리 삶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고 우리에게는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로 각자의 자리에서 또 각각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마가는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바로 이어서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힐난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이방으로 물러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달마누다 지방으로 돌아오셨습니다(10절). 달마누다 지방은 갈릴리 호수 서쪽에 있는데 마가단(마 15:39), 또는 막달라라고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경 안으로 들어오시자마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난한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힐난한 이유는 첫째, 7장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외식자라는 책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돌보신 사건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도 않으셨고 이방인들을 돌보시고 먹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12절). 바리새인들의 표적을 구하는 태도가 믿음의 태도가 아니로 적대의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앞에 하나님을 두고도 그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들의 기준에 예수님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를 깨닫지 못한 모습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님보다 더 강했습니다. 자기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가르침을 구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표적을 구하는 쪽으로 비뚤어졌습니다.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으신 이유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이 세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명명백백하게 모든 사람이 보고 예수님께 엎드리는 일은 이 세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대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것 자체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지 않아도 하늘로부터 징조가 임하고 각종 이적이 보일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앞에 똑바로 설 수 없습니다. 다 무릎을 꿇게 됩니다.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즉 재림에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믿음으로 믿는 세대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적을 보고 믿는 세대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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