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마가복음 8장 27절 - 9장 1절 |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2024. 3. 3. 11:33성서유니온 매일성경/마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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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27-9:1

찬송가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고쳐주시고는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8:26). 마을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주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 세대에는 그 영광을 숨기신 것입니다. 오직 개인적으로 소수만 그 영광을 누리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9:1). 믿음으로만 예수님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아가셨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당시 우상의 근거지였습니다. 그곳은 갈릴리 호수 북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판 신을 위한 신전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곳을 파네아스, 또는 파니움이라고 불렀습니다. 판신을 모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곳은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던 곳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바알 신전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알 숭배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바알갓(수 11:17, 12:7), 또는 바알헤르몬(삿 3:3; 대상 5:23)이라고 불렸습니다. 바알헤르몬이라고 불린 이유는 이곳이 헤르몬산 아랫쪽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헤르몬산은 성경에 바산이라고도 나오는 산입니다. 마이클 하이저가 쓴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책에 보면 바산이라는 지명의 어원을 바단이라고 합니다. 바단은 우가리트어로 뱀이라는 뜻입니다(마이클 하이저, 보이지 않는 세계, 345쪽). 이런 것을 종합하여 볼 때 예수님께서 가신 빌립보 가이사랴는 대대로 뱀의 자리로 쓰이던 곳이었습니다. 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우두머리 곧 사탄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가셔서 당신님께서 누구신지를 본격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27절). 그러자 제자들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가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마 16:17). 베드로 스스로 깨달아 안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습니다. 

자기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심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30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당시 세대가 그리스도의 영광이 숨겨진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단지 소수에게만 당신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9:1-9). 그렇게 하신 이유는 나중에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증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하셨습니다(38절). 당시 세대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31절). 

항변하는 베드로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을 때(31절)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32절). 항변했다는 말은 원어로 꾸짖었다(ἐπιτιμάω)는 뜻입니다. 마치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를 꾸짖듯이 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녀를 꾸짖는 이유 중 대부분은 자녀가 혹시 경거망동하다가 다치기라도 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항변한 이유도 똑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잘못되면 안 된다면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잘 되셔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꾸짖으시는 예수님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데에서 베드로를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꾸짖다(ἐπιτιμάω)라고 번역된 말과 베드로가 항변했다고 한 말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잘못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은 부활로 이어지는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나아가는 것은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33절 하).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입니다. 

우상숭배와 십자가

빌립보 가이사랴는 대대로 사탄의 자리입니다. 우상숭배의 장소입니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가 잘 되기만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잘 되려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스스로 잘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잘 되는 방법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십자가를 마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진정 잘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진정 잘 되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34절).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잘잘못을 자기가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잘잘못을 판단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의 시야는 한정적입니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부인한다는 말은 철저하게 거절하고 단절한다(ἀπαρνέομαι)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자기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 상반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자기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절연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8:11, 15). 

 

매일성경 | 마가복음 8장 27절 - 9장 1절 |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자기 십자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든 것은 자기가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형수들은 자기가 달려 죽을 십자가를 자기가 운반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얼마나 큰 반역을 저질렀는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렇게 하고 십자가에 참혹하게 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입에도 올리기 어려운 무서운 단어였습니다. 그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특별히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가 죽을 사형틀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항상 기억하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나의 죄를 다 속하시고 용서하신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려면 내가 나의 사형틀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따라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옳고 의롭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귀한 진리를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에게도 가르쳐주셨습니다(34절 상). 

자기 목숨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35절에는 잘되는 것과 잘못되는 것이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잘 되는 것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는 것입니다(35절 하). 잘못되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36절).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 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을 다른 것과 바꾸는 개념으로 이것을 설명하십니다. 마치 돈을 내고 어떤 물건을 사는 것으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자기 목숨이 있습니다. 이 목숨은 온 천하와 바꿀 수 없습니다. 온 천하를 준다고 해도 자기 목숨이 날아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목숨은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사형틀을 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목숨을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절대 자기 부인하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자기 목숨이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주인 삼지 않고 자기를 부인합니다. 자기 목숨을 버려 자기 사형틀을 짊어집니다. 그렇게 하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묵묵히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목숨을 드려서 예수님과 복음을 사는 것은 너무도 지혜로운 소비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은 내 목숨을 죽이고 새 생명,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려면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는 것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입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하지만 이 세대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입니다(38절). 이 귀한 진리를 비웃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합니다(38절).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 가치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기 목숨을 자랑합니다. 즉 자기가 얼마나 잘 되는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자기가 행한 대로 그대로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 대로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일까요?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하찮게 여기면서 사는 사람의 최후입니다. 

권능의 왕국이 임하는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하들과 함께 올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권능의 왕국이 임하는 때입니다(8:38, 9:1). 우리는 재림의 때에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림 전에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이미 그러한 모습을 소수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9:1). 

영광과 고난이 함께 있는 세대

지금 이 세대는 영광과 고난이 함께 있는 세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있을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영광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 영광을 누리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직 권능의 왕국이 눈에 보이게 임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능의 왕국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 극치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을 박해했던 세력에 의해서 우리도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만 십자가 너머 부활을 바라보면 소망 중에 따릅니다. 죽음에도 소망이 있음을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깨달았기 때문에 목숨 드리기를 아까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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