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28장 1-15절 | 멜리데에서 일어난 일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함

2024. 6. 29. 12:42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28:1-15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의인 한 사람 덕분에

    하나님께서는 배가 다 깨어지는 상황에서 배에 탔던 276명 전원을 다 살리셨습니다(27:37, 44).  중간에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백부장을 사용하셔서 한 사람도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선원들이 배에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고(27:31, 32) 배에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배불리 먹게 해서(27:38) 바다에 들어갔을 때 기진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백부장은 죄수들을 다 죽이자는 군인들의 의견을 막아서 바울과 모든 죄수들을 살렸습니다(27:42-43). 백부장이 죄수들을 죽이자는 의견을 막은 이유는 바울을 살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바울 한 사람 덕분에 구원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꼬박 두 주 동안 바다에서 풍랑으로 고초를 당한 사람들은 배가 깨어지는 와중에도 뭍에 당도해서 다 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구원 역사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의인 한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덕분에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게 되었다"라고 주석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자녀들로 말미암아 덕을 입는다"라고 이 일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교회는 지금도 이런 혜택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

    1-15절에서 박윤선 목사님은 위로를 발견합니다. 박 목사님이 발견한 위로는 여섯 가지입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81쪽).

     

    격언에도 고진감래란 말이 있는데 성경은 더욱 많이 이와 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바울이 지중해에서 파선의 위험으로 많이 고생한 뒤에 이제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위로를 받았다. 

    1) 멜리데 섬의 토인들이 불을 피워 바울 일행을 위로했으며(1-2절),
    2)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어도 조금도 상함이 없었고(3-6절),
    3) 그곳 추장 보블리오가 바울 일행을 친절히 대접했으며(7절),
    4) 병고침 받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후대하였다(9-10절). 그리고
    5) 석달 후에 보디올에 이르러 믿는 형제들의 영접을 받았고(13-14절),
    6) 로마에 가서는 그곳 교회 형제들의 환영을 받았다(15절). 

    독사가 나와 그 손을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사람들은 멜리데 섬에 구조되었습니다(1절).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멜리데"는 현재 몰타 섬인데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이 섬은 시칠리 섬의 남쪽에 있고 면적이 316㎢ 정도 되는 작은 섬입니다. 이 면적은 제주도의 1/6 수준입니다. 이 섬은 현재 여섯 개의 섬으로 구성도어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견종 말티즈가 몰타 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몰타섬(멜리데) Sliema Ferry

     

    비가 오로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원주민들이 불을 피워서 조난 당한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2절). 원주민이란 말(βάρβαρος)은 헬라어나 라틴어를 쓰지 않아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몰타 섬은 지금도 몰타어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불을 피워서 환대하는 중에 바울이 독사에게 물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3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83쪽). 

     

    학자들 중에는 현재 몰타 섬에 독사가 없다는 이유로 이 구절의 순정성을 의심한다. 그러나 1853년 류윙(Lewing)이란 학자는 이 섬에서 독사를 보았다고 증거하였다(Lenski). 설혹 지금은 그 섬에 독사가 아주 없다 해도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어떤 지방에서든지 인구가 많아지면 거기 살던 짐승도 점차 쇠퇴하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자취를 감추는 일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다. 란드스버로(Landsborough)는 아란(Arran) 섬에서 지내 본 대로 거주민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서 독사들이 점차 없어졌다는 것이다. 웰렝가는 여기 언급된 독사가 상징적 의미도 가진다는 의미로 말하기를 "이 사건(독사가 바울을 물은 사건)은 옛뱀(마귀)과 교회(회복된 낙원)과의 전투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윤선 목사님은 성경 비평학과 싸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학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한 것입니다. 그런면서 웰링가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문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이 복음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서도 바울을 지켜주셨습니다. 

    자연 계시와 원주민들의 생각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원주민들은 바울이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공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즉 바울이 살인 죄수인데 바다에서는 어찌 살았을지 모르지만 공의가 그를 죽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4절). 그런데 바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뱀을 불에 떨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고 조금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뱀에 물렸지만 피도 나지 않았고 상처도 없었습니다(5절). 이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놀랍게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본 원주민들은 바울이 죽을 것으로 알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상이 없자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6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83쪽).

     

    토인들이 처음에는 바울을 살인 죄수로 억측하였다가 그에게 나타난 이적을 본 뒤에는 그를 "신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를 살인 죄수로 안 것도 잘못이고 신이라고 생각한 것도 잘못이다. 인간은 인간을 너무 낮게 보는 병통이 있는 동시에, 너무 높이는 죄도 범한다. 

     

    이것이 사람의 연약성입니다. 사람은 일어난 일로 잘못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잘못되는 사람을 죄인으로 억측하기도 잘하고 갑자기 잘 되는 사람을 신으로 추앙하기도 잘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자연계시에 대하여

    메튜 헨리 목사님은 토인들 안에 있는 자연 계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자연 계시의 긍정적인 면. 그 사람들은 토인들이었다. 아마 그 토인들에게는 책은 물론 어떤 교육의 수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연 계시를 통하여 다음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1) 그들은 자연 계시를 통해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모든 역사를 주재하시는 섭리가 있다는 것과 또한 모든 일이 우연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로 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그들은 죄인들은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선한 일은 상 주시고 악한 일은 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복수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서운 죄악에 대해서는 불원간에 그 대가가 치러진다는 것을 알았다. 토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께서 복수하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 하셨음을 믿고 있었다.

    3) 토인들은 살인이 극악무도한 죄이며 이러한 죄는 오래가지 않아 처벌된다는 것과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 피가 갚아지지 않는다면(이런 경우는 법에 의해 처리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모든 불의의 보수자이신 하늘과 땅의 공의로우신 심판관이 그 피를 갚으실 것이라고 믿었다. 악을 행하고도 처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야만인들을 통해서라도 정죄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 야만인들은 학식은 없었으나 "악한 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그들에게 불운이 닥치리라.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수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여러 번 법을 피하여 왔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며 "우리가 계속 악을 행한다 해도 별일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또 "그들의 악행에 대한 처벌이 속히 닥치지 않는다고 해서" 더욱 대담하게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본문의 무지한 사람들을 통하여 범죄자는 바다의 보복은 피할 수 있지만 사람은 신의 공의를 벗어날 수 없고,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욥의 시대는 누구보다 "악인에게는 반드시 멸망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연 계시의 부정적인 면.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특수 계시에 의하여 교정되어야 할 것들이다. 두 가지 점에서 이 토인들의 생각은 불완전했다.

    1) 모든 악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점이 잘못된 생각이었다. 즉 보수하시는 신은 살인자들과 같이 악명 높은 죄인들을 결코 오래 살려 두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죄인들이 "함정에서 나오면 올무에 걸린 것이고"(렘 48:43, 44) "사자를 피하면 곰을 만날 것이요"(암 5:9) 익사 직전에 구조되면 독사가 그들을 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살인자들과 같은 악한자일지라도 "오래 살 수 있으며 또한 권력까지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보복의 날, 격노의 날이 저 세상에서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몇몇 사람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처벌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고 살아가는데 이는 심판이 장차 있을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2) 인생의 여정 곳에서 크게 괴로움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실로암에서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한 것같이 뱀에게 물린 사람을 보자 곧 그를 살인자라고 단정해 버렸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처지를 판단할 때 범한 실수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의 특수 계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밝은 이해를 제시하여 준다. 즉 모든 일들은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선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믿음과 인내를 강하게 하고 개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대단한 고난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양심이 떳떳하므로

    바울이 아무런 동요 없이 독사를 불 속에 떨어 버린 장면에 대하여 메튜 헨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의 능력 안에서 신도들은 사탄의 유혹을 거룩한 결단으로 떨쳐버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 여호와께서 너를 벌하시리라"라고 말하여야 한다. 사탄이 성도들에게 달려들지라도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며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못하는 것이다"(요일 5:18). 우리가 양심이 떳떳하므로 인간들의 비난과 질책을 무시할 수 있을 때 또한 거룩한 경멸의 태도로 그 비난을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도 바울처럼 "독사를 불 속에 던져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비난과 책망이날 우리가 그것을 무심코 들어 넘길 수 있다면 또는 그 비난으로 우리 의무 수행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는다면 또는 그것으로 격분되어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다면 해될 것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살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살린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로마 군병들에게 억류될만한 죄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탄이 훼방할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실로 양심이 떳떳했습니다. 그가 뱀에게 물려 죽어야할 만한 죄가 그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메튜 헨리 목사님이 "우리가 양심이 떳떳하므로"라고 할 때 이 말은 모든 일에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향하여 양심이 떳떳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말입니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서 사람들이 비난하고 책망할 때 정말 그 사안에 대해서 결백하다면, 즉 양심이 떳떳하다면 우리는 바울처럼 독사를 불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들어도 무심코 넘길 수 있고 의무를 수행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역자들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양심이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므로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험한 꼴을 모면하기 위해서 말을 바꾸는 것입니다. 교역자들은 이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멜리데에서 로마로

     

    환대 받고 환대함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보블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 일행을 특별하게 환대했습니다(7절). 하나님께서 환대하는 사람을 바울 일행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것을 안 바울은 그에게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러자 그 병이 나았습니다(8절). 그 소식이 섬에 알려져서 병든 사람들이 와서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9절). 그 결과 바울 일행은 더욱 후하게 대접을 받고 모든 쓸 것이 넉넉하게 채워졌습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방법으로 전도자 일행의 쓸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멜리데의 주민들에게도 큰 복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메튜 헨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거센 바람은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멜리데 섬에 분 폭풍은 그 섬 주민들에게 유익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그 바람이 가는 곳마다 그곳에 축복이 되는 바울을 석달 동안 그곳에 머물게 하였기 때문이다. ...

    그들이 바울을 영접함으로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나그네를 영접하게 하는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써 어떤 이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게도 되며 그리스도의 사도를 대접하게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곤경에 빠진 그의 백성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을 보답하는 것을 지연시키지 않으신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하다

    11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배에 승선했던 모든 사람들은 석 달을 그 섬에서 지냈습니다. 마침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 배의 이름은 디오스구로였습니다. "디오스구로(Διοσκούροις)"는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들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신들을 선원들의 수호신으로 여겼습니다(11절). 누가가 배의 이름을 자세하기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 메튜 헨리 목사님은 이 기록의 내용이 진실함을 더욱 확실하게 밝혀주기 위해서라고 주석합니다. 그들은 수라구사에 도착해서 3일을 지냈습니다. 수라구사는 시칠리 섬의 동쪽에 있습니다. 

     

    바울의 말 대로 석 달 후에 겨울을 지내고 나서 항해를 시작했기 때문에 역풍이 아니라 순풍이 불었습니다. 남풍이 일어나서 보디올에 금방 도착했습니다(13절). 보디올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항구입니다. 당시에는 그 항구로 알렉산드리아 곡물 운반선이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한 바울 일행은 형제들을 만나서 거기에서 7일을 함께 머물렀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84쪽). 

     

    바울은 "보디올"에서 믿는 "형제"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고, 또 로마에 있는 신자들이 환영 나온 것으로 인하여 담력을 얻었다. 그는 이 때에 긴 여행길에 지친 심신의 피로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우리의 한평생 인간고가 커서 태산 같을 때도 있지만 그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하나님의 위로도 간간이 있는 법이다. 

     

    바울이 로마로 갔을 때 로마의 형제들은 이미 바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보디올의 형제들이 소식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로마의 형제들은 바울을 맞이하러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나왔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에 의하면 압비오는 로마에서 약 64km정도 되는 거리이고 트레이스 타베르네는 압비오를 지난 여행자들을 접대하는 여관이 많은 지방인데 여기에서 로마는 더욱 가깝다고 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85쪽). 

    성도의 교제로 담력을 얻음

    로마에 있는 믿는 형제들이 바울을 맞으러 나온 것을 본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습니다(15절 하). 형제들의 환대는 전도자에게 이렇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전도자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로 성도의 교제로 힘을 얻게 하십니다. 하지만 성도의 교제로 힘을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에서 먼저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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