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5장 27-42절 | 회개하지 않는 공회 회원들과 예수의 이름으로 능욕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도들

2024. 5. 11. 09:56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5:27-42

    찬송가 505장 온 세상 위하여


    문맥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표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표적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예수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4:2)입니다. 이 표적을 시작으로 예루살렘에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는 그 시작점은 박해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행 4:2). 그래서 그들이 가진 공권력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엄히 경고했습니다(4:18).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기 시작하자 동시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도들과 교회는 박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온 교회는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4:30). 그 결과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5:12). 질병이나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은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5:16). 복음은 이제 예루살렘을 넘어서 예루살렘 부근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5:16 상).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 당파는 마음에 시기가 가득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5:17-18). 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풀어주시면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5:20). 그 명령대로 성전에 서서 가르칠 때 성전 맡은 자와 부하들이 다시 가서 그들을 잡아왔습니다(5:26). 여기까지가 앞의 내용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공회 회원들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사도들을 잡은 사람은 성전 맡은 사람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가 그들을 잡은 것입니다. 잡아서 이번에는 공회 앞에 세웁니다. 이 공회는 예수님을 잡아서 로마에 넘겨 죽인 바로 그 공회입니다(28절). 공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한 이유는 예수님을 죽인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인 자기들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임합니다(3:19).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죽인 자기들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병든 자, 고통당하는 자들은 모두 사도들에게 와서 고침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눅 6:20-23). 하지만 부유한 자, 높은 자리에 앉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배부른 자, 웃는 자, 사람들이 칭찬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성취되고 있습니다(눅 6:24-26; 11:42-43). 

     

    공의회 회원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에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하지 못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귀로 듣고 있지만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온통 그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자기들을 지지하게 할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지위, 나의 안위에 대한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이것들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세우시고 나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들의 담대한 증언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담대하게 대답합니다(29절). 이들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33절). 베드로와 사도들은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죽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안위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삽니다.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더 중요하다는 자세로 삽니다. 나의 안위보다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다시 증언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30절)" 예수님을 너희가 저주 받은 자로 죽였지만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합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31절 상). 또한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면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계신다고 합니다(31절 하).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데 무엇을 목적으로 다스리시냐면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다스리신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이 일에 자기들이 증인이라고 합니다(32절 상). 또한 성령님도 이 일에 증인이시라고 합니다(32절 하). 증인은 이 사실을 보고 목격한 사람입니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증인이 여럿입니다. 게다가 성령님도 증인이십니다. 율법에 두 세 사람의 증언은 효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증언은 사실입니다. 공의회 회원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이들이 율법에 정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이 증언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율법보다 자기들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다스리신다고 한다면 자기들에게도 회개의 기회가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체계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너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진 것은 그들에게 화가 되었습니다. 

    가말리엘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공의회 회원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크게 노했습니다. 그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33절). 자기들이 가진 권력을 감정대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의 권력은 철저하게 사적인 권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아직 사도들이 다 죽을 때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말리엘을 사용하셨습니다.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34절). 그는 공의회 회원들에게 하나님을 생각하자고 권면합니다. 사도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이 운동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고 합니다(39절).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믿음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록 율법의 수준이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9절)"

     

    공의회 회원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40절). 회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는 않으려고 했습니다. 크게 보면 이것도 자기들의 안위를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들은 한 쪽 발은 세상에, 한 쪽 발은 하나님께 두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상숭배의 모습입니다. 혼합주의는 곧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공회 회원들과 예수의 이름으로 능욕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도들

    받는 능욕을 오히려 기뻐하는 사도들

    반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채찍질 당한 것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박해가 이들의 믿음을 더 강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당한 것을 오히려 특권과 영광으로 여겼습니다(41절). 이들이 이렇게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길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입으로는 죽기까지 따라갈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다 도망갔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따라갈 수 없음을 처절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해진 지금은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기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힘 주심으로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영광스러워한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사도들은 박해로 힘을 얻었습니다. 박해로 힘을 받은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멈추지 않았습니다(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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