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신명기 10장 1-22절 | 언약의 갱신과 마음의 할례

2024. 1. 22. 08:29성서유니온 매일성경/신명기

목차


    신명기 10:1-22

    찬송가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언약이 갱신되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모세의 중보로 언약이 갱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두 돌판에 십계명을 다시 기록하고 그 두 돌판을 나구궤에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그 나무궤를 법궤라고 합니다. 법궤에 하나님의 계명이 쓰인 두 돌판을 보관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이 궤를 증거궤라고도 합니다. 이 증거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나무궤에 넣어진 두 돌판

    이 두 돌판은 나무궤에 넣어져서 잘 보관 됩니다. 깨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언약이 잘 보존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위협은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나무궤 안에 담긴 언약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기록된 십계명의 말씀

    십계명의 말씀이 깨어졌다가 모세의 중보로 다시 기록되었습니다. 십계명의 말씀은 명령이라기 보다는 선언이며 약속입니다. 문법적으로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 미완료로 쓰인 것입니다. 직역하자면 "너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됩니다.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그렇게 되게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돌판에 새겨진 계명의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배반한 사건입니다. 이 죄는 진정 멸망 받아 마땅한 죄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멸망 받지 않은 이유는 모세의 중보 덕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빚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부패하여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십계명은 우리에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나온 말씀대로 예수님을 닮는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하나님의 길로 계속 전진하다

    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   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6-9절은 광야 여정을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언약이 갱신된 덕분입니다.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중보의 효력 덕분입니다. 그들은 멸망 받을 위협에서 벗어나 여정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아론을 위해서 중보한 것도 효력이 있었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직을 잘 수행하고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를 이어서 그 아들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6절). 또한 레위 지파가 구별되어 세워졌습니다(8절). 그들은 여호와 앞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가 행한 중보사역이 레위지파에게 이어진 것입니다. 이 레위지파를 통해서 모세의 중보는 여전히 효력을 발휘해서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8절 하). 하나님의 모든 선물, 즉 언약 궤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 계속 되었다는 뜻입니다. 

    레위 지파

    레위지파는 하나님 가까이에서 섬기는 직임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분깃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 즉 레위지파는 한 군데 모여살지 않고 각 지파에 흩어져서 하나님으로 기업을 삼아 직임을 수행하고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복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골고루 임하도록 하는 사역을 하도록 구별된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지파에게도 복이요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도 복된 일이었습니다.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10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로운 백성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받았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중보로 그들은 멸망받지 않았습니다(10절).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생명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리라 말씀하십니다(11절). 모세가 먼저 길을 떠나는 것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음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게 길을 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거하게 됩니다(요 14:1-3). 

     

    매일성경 | 신명기 10장 1-22절 | 언약의 갱신과 마음의 할례

    이제 이스라엘아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2절은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이 생략되어 있지만 이 말은 중요합니다. 4장 1절에도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아"가 나옵니다. 이 말씀으로 4장 1절은 1-3장 말씀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12절은 9장 7절부터 10장 11절에 나온 사건을 생각하면서 받을 교훈이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금송아지 사건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새롭게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네 하나님 여호와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범죄로 깨졌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회복된 관계로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이스라엘에게 무언가를 다시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신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바라시고 순종을 명령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멸망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심으로 우리가 계속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속 산다는 것만도 감사한데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의 하나님으로 불리시면서 우리에게 다시 명령하시고 당신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은 무겁지 않습니다.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다섯 가지

    첫째, 경외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언약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그 자녀들은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항상 배워야 합니다(4:10; 14:23; 31:13).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율법을 쓱 읽으므로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항상 배워야 합니다(17:19).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나님의 계명을 염두에 둡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는 것 만큼만이라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두려워한다면 우리의 행동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내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를 강조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그의 모든 길들 안에 걷는 것

    둘째,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의 모든 길들 안에 걷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가 이 뜻입니다. 그의 모든 길들은 하나님의 길을 의미합니다. 길은 사람이 많이 지나다닌 곳에 납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살면 다른 사람이 다들 다니는 넓은 길로 가게 됩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그 길은 넓고 쉽고 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은 "생각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음성을 발하시면서 말씀하신 것(4:14-17)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각 없이" 애굽에서 보고 배운 대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대로 행하면서 그 송아지 형상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생각 없이 다니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길로 다니는 것은 반드시 생각하고 깨닫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로 다니려면 하나님의 명령을 입으로 자꾸 말하고 마음에 간직해서 그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뜻을 깨달을 수 있고 비로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그대로 행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일어납니다. 그 소망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길들 안에서 걷는 것은 생각하고 깨달아 믿음으로 걷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세 번째는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곡식의 풍성함과 물질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1:13-15).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나안의 모든 백성은 그들 앞에서 쫓겨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의 소유로 주실 것입니다(11:22-25).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30:16, 20). 

     

    기억할 것은 사랑의 동기가 복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복을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먼저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고 깨달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엄청난 죄를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사춘기 자녀가 자기를 용납해준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나중에 진심으로 부모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깊이 깨달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나오고 그 뒤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갑니다. 마치 부모를 두려워해서 그 자녀가 섣불리 행동하지 않듯이, 또한 사랑하는 이 때문에 여러 책임을 기쁘게 감당하듯이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넷째, 섬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네 번째는 "온 너의 마음과 온 너의 영혼으로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말씀은 섬김입니다. 섬길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기는 것의 의미는 일하다, 종으로서 섬긴다, 예배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의 목표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서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출 4:23; 7:16; 8:1; 20; 9:1, 13; 10:3, 26). 이스라엘은 바로를 섬기기 위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존재라는 주장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한 존재, 하나님만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일하는 목적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돈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돈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돈을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도 믿는 사람은 돈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일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섯째, 지키는 것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다섯 번째는 "여호와의 명령들과 내가 너에게 오늘날 명령하는 법규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법을 선언하는 시점입니다. 여호와의 법은 언제 선언되어야 하는가? 바로 오늘 선언되어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 지키는 것은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명령과 법규들을 마음에 간직하면 그것을 자꾸 생각하게 되어있습니다. 자꾸 생각하면 깨닫게 되고 깨달으면 믿게 됩니다. 그 믿음이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명령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직역하면 "이것이 너에게 좋기 위하여"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 "좋다"라는 말이 똑같이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이 다섯 가지 요구는 한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믿음입니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는 유대 전통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613개의 계명을 주었고 다윗은 시편 15편에서 15개의 계명으로 함축시켰으며, 이사야는 6개의 계명(사 33:15~16), 미가는 3개의 계명(미 6:8), 이사야는 2개의 계명(사 56:1), 이윽고 하박국(합 2:4)은 단 하나의 계명으로 소개했다.” 여기서 하박국이 소개한 단 하나의 계명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그것을 인용해서 복음과 연관 짓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온 우주적 하나님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4절은 "보라"라는 말로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우리말 성경은 "보라"를 생략하고 번역했습니다. 중요한 말을 위해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늘들, 그리고 하늘들의 하늘들은 여호와께 속해 있습니다. 이 하늘들은 중첩된 공간 또는 가장 높은 하늘을 나타냅니다. 모든 공간이 다 하나님을 향하여 있고 하나님을 목적으로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도 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목적으로 있습니다.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 우주의 의미이시며 목적이시고 주권자이시며 주재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상도 되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음의 할례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은 마음에 할례를 행합니다(16절). 마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마음의 포피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포피를 70인 역은 "너희 마음의 단단함"으로 다른 역본들은 "마음의 어리석음", "너희 단단함 또는 어리석음의 포피", "너희 마음의 완고함"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마음의 완고함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큰 음성으로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너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음이 단단하면 인격적 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경험이 쌓이면 확증 편향이 생깁니다. 즉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 그러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말을 해도 잘 듣지 않게 되므로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기 어려워집니다. 그 결과 목이 곧아집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데도 그 명령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가겠다고 목을 뻣뻣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송아지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우상입니다. 즉 우상처럼 되는 것입니다(시 115편, 사 6장).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믿음의 본으로 보이셨습니다(마 10:14-15). 어린아이의 마음은 부드럽스빈다. 잘 받아들이고 잘 고칩니다. 잘 통합니다.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탁월해서 친구를 잘 사귑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래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우리 목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 영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는 살 같은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겔 11:19-20).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경영하시는 재판관이시고 왕이십니다(17절). 그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십니다(18절).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신 분이십니다(14, 17절). 그 하나님께서 부유하고 강한 자들의 영광과 권력을 위하신다고 하지 않고 가난하고 힘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을 돌보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신다고 합니다. 

     

    여기에 참 놀라운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까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때는 약자가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약 1:27). 이스라엘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상처럼 되지 말고 하나님처럼 약한 이들과 진정한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 개인에게 다시 말씀하심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20절은 단수 "너"를 사용합니다. 모세의 설교는 공동체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입니다. "너"를 사용해서 앞의 명령을 다시 반복합니다. 나 개인은 하나님을 경외히야 하고 섬겨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합니다. 공동체도 중요하지만 "나"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찬양이십니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노래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담고 소중히 여기는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하나님을 닮아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약자를 돌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할 것입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 결과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우 70명이었으나 지금은 하늘의 별처럼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약속이 성취된 것처럼 그들은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이미 받았으니 내세의 영원한 복도 받을 것입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