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신명기 15장 1-23절 | 빚을 면제해 주는 것과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

2024. 1. 30. 15:51성서유니온 매일성경/신명기

목차


    신명기 15:1-23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안식일 계명

    14장 28절부터 16장 17절까지는 넷째 계명과 연관됩니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 계명입니다. 안식일 계명의 정신 중에서 중요한 정신은 집 주인인 내가 안식을 누릴 때 그 집안 모든 이가 안식을 누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집 안의 아내나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나그네나 가축까지도 다 안식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일 계명의 정신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생계를 위해서 걱정하지 않고 안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삼년 끝에 십일조를 성읍에 저축하는 것입니다(14:28). 이어지는 15장 말씀은 면제년에 관해서 나옵니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

    15장 전체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을 주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 중 하나는 가난한 자에게 풍족하게 꾸어주고 그들을 돌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자기만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안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안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은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안식입니다. 

    땅의 안식과 면제 

    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이 부분은 출애굽기 23장 10절에도 나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그 땅의 안식에 관해서 말씀한다면 신명기 본문은 면제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이 두 본문은 샤마트(שָׁמַט)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한 쪽에서는 땅에, 다른 한 쪽에서는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이 말은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3장 11절에는 "그러나 일곱째 해에는 너희가 그것을 놓아줄지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신명기 15장 1절은 "매 칠 년 끝에는 너희가 놓아주기(쉐미타: שְׁמִטָּה)를 할지니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신명기는 놓아주는 범위를 확장합니다. 땅뿐만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놓아주기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빚을 놓아주면

    놓아주는데 빚을 놓아줍니다. 가난의 근본 원인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빚입니다. 이 빚을 청산해 주는 것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4-5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놓아주는 것은 빚 자체라기 보다는 담보물입니다. 2절을 직역하면 "담보물을 자신의 손에 쥔 모든 자는 무엇이든 자신의 담보물로 받은 것을 그의 이웃에게 놓아줄지니라" 이렇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담보물은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사실상 빚을 놓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독촉하지 말고 담보물을 돌려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놓인 사람은 받은 담보물, 즉 땅을 열심히 경작해서 원금을 갚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면제를 믿음으로

    이 면제의 선포는 믿음의 선포입니다(2절 하). 왜냐하면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 면제는 여호와의 면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면제를 선포하시기 때문에 받는 면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면제할 때 그를 면제하고 놓아주는 것의 기초는 믿음입니다. 나의 관대함과 관용이 아닙니다. 나의 관용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면제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외국인은 제외함

    3절에 보면 이방인이나 외국인은 면제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안식은 언약 공동체가 누리는 안식입니다. 즉 내가 면제를 해 주는 상대방은 언약 공동체 안에 있는 이웃이나 형제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요구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당장 내가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을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항상 보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나의 자리에서 내가 나의 형제나 이웃에게 얼마나 관대하게 대하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까운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원한을 품는다면 그것은 믿음의 행동이 아닙니다. 보통 용서해야 할 대상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외하는 이유

    당시 사회적인 배경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섞어 사는 이방인들은 대게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삶의 터전이 정착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채무는 좀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들은 언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용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까지 면제를 베풀면 언약 공동체의 부가 이들에게 다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4-5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는 말씀은 11절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와 충돌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4-5절에 나오는 말은 이상을, 11절에 나오는 말은 현실을 말씀한다고 보면 이해가 됩니다. 이상은 율법을 다 지켜 행하였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그 받은 복으로 면제하고 구제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난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현실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합니다(7-11절).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11절에서 "반드시" 구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에 뿌리박힌 이상을 설교함

    설교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설교는 이상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현실에 뿌리 박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강조해야 할 것을 제대로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말씀하면서 성도들이 이상을 함께 꿈꿀 수 있도록 하고 현실을 말씀하면서 말씀대로 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꼭 행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취됨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4절에서는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없었다"라고 나옵니다. 즉 "없으리라(현재시제)"라고 한 말씀이 "없었다(과거시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들은 온 무리가 은혜를 받아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시선을 현세에 묶어두지 않고 영원 차원으로 옮깁니다. 그 결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경제원리

    6절에서는 사회에 하나님의 관대하심이 나타나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지는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의 결과 나라가 채무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적자를 피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해집니다. 그래서 꾸어주는 나라가 됩니다. 이런 나라가 되는 길은 권력자나 대기업 중심으로 돈을 끌어모으는 데 있지 않고 나라 안에 있는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는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경제 원리입니다. 지금 현재에는 이것을 그대로 경제정책에 사용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넉넉하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7-11절은 형제에게 넉넉할 것을 강조합니다. 8절에 "반드시", "넉넉히", 10절에 "반드시"가 그것을 강조합니다. 형제에게 넉넉하려면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7절 하). 마음을 완악하게 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마음을 단단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형제를 향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마음을 닫지 말고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10절). 이어서 반드시 손을 펴야 합니다(8, 11절). 

     

    매일성경 | 신명기 15장 1-23절 | 빚을 면제해 주는 것과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

    신체언어

    이 구절들은 신체언어로 마음을 나타냅니다. 손을 펴라는 말은 채무자에 대한 권리를 놓으라는 말입니다. 즉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빌미로 권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

    가난한 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분명히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채권자들도 그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손을 펴서 놓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마음이 단단해지거나(7절 하) 악한 생각으로(9절 상) 가득하게 되면 아끼는 쪽(10절)으로 기울게 됩니다. 모세는 그 마음의 말을 요목조목 짚어가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경제를 좌우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는 전체 공동체의 마음과 손의 변화가 일어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후함과 인색함은 눈에 나타남

    눈도 중요합니다(9절).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또한 어렵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18절). 눈은 후함과 인색함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에서는 그것을 좋은 눈과 나쁜 눈에 비유합니다. 밝은 눈은 온 몸을 밝게 합니다. 이런 눈을 가진 자는 재물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마 6:24). 반면 어두운 눈은 온 몸을 어둡게 합니다(마 6:23). 이런 사람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내가 인색한가 아닌가는 내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로 판가름납니다. 내가 만약 사람을 나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바라본다면 그는 인색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내가 사람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그가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관대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 본문에서 빚진 자, 즉 가난한 자는 나의 이웃과 형제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고 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데 나만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보면 부자는 날마다 안식을 누리면서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문 앞에는 헌데를 앓는 거지가 앉아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 비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웃을 대하는 사람은 손을 움켜쥔 사람, 마음이 단단한 사람, 눈이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히브리

    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18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2-18절의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2-11절에도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히브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라기 보다는 사회경제적인 말입니다. "히브리"는 보통 "하비루"와 연관되기도 하는데 "하비루"는 자기 고향에서 쫓겨나서 다른 환경에 살면서 노동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히브리"는 이스라엘 내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형편이 어려워져서 땅을 팔고 종이 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땅이 없으니 그들은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종이 된 것입니다. 

    동족 히브리

    12절에 보면 "히브리"라고 하면서 그를 가리켜서 "동족"이라고 합니다.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신분이었는가를 항상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건너온 사람이 아니냐, 애굽의 종이었다가 해방된 사람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15절). 그러므로 그의 처지가 곧 너의 과거 처지니라, 이런 뜻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종을 마구잡이로 대할 수 없습니다. 

    전별금을 후하게 주어야 하는 이유

    종을 놓아줄 때에는 전별금을 후하게 주어야 합니다(13절). 14절 "그에게 후히 줄지니" 이 말씀은 "너는 그에게 화관을 씌울지니라"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떠나는 종을 위하여 가축과 곡식과 포도주라는 화관을 넉넉히 씌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종의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귀한 자본이 됩니다. 종의 그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종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 종에게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라는 것입니다. 

    종에게 후히 주어야 하는 첫번째 근거

    종에게 후히 주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그 근거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구속해 주시고(15절)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14절). 내가 경제적으로 종을 부리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내가 종의 신분에서 해방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이전에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즉 죄와 사망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14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나에게 풍부한 소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후히 주라고 하실 수 있으십니다. 

    두 번째 근거

    그 근거 두 번째는 종이 나를 위해서 제공한 노동력이 나에게 크게 유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18절 상). 품꾼을 고용했더라면 훨씬 큰 비용이 들었을텐데 종이 있었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 일이 해결된 것입니다. 종 덕분에 나의 재산이 불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이 나갈 때에 후히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정확하십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가 얻은 이익은 적게, 나갈 돈은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 보면 나갈 돈이 오히려 훨씬 적습니다. 이익이 훨씬 큽니다. 모세는 사람의 그런 마음을 꿰똟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예외사항, 사랑

    12-18절에 나오는 법의 기본 원리는 종들이 일곱째 해에 "섬김"에서 놓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 이하에는 예외사항이 나옵니다. 이 법은 예외가 적용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종이 스스로 남겠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종이 남고자 하는 이유는 주인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16절 상)"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잘 이해되지 않지만 성경에는 풍부한 예가 나옵니다. 먼저 아브라함과 욥의 종들을 생각해 보세요. 또한 탕자의 아버지에게 속한 종들을 보세요. 이들은 품꾼보다 양식이 넉넉했습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넉넉하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는 종들입니다.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십니다(약 1:5).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고후 9:8).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더욱 넘치도록 능히 역사하시는 분(엡 3:20)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십자가에 잘 드러납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롬 8:32).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씁니다(롬 5:8).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우리에게 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섬기는 자들에게 후해야 합니다. 

    영혼의 안식

    이 법은 안식일 계명과 연관되는 법입니다. 안식을 생각할 때 보통은 육체적인 안식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혼의 안식입니다. 나를 섬긴 사람이 나를 향하여 섭섭한 마음으로 나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찝찝할까요? 나의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사람의 안식은 개인으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후하게 대접하고 나가는 이는 나를 축복하고 그래야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초태생을 드리는 법도와 유월절

    19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20   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21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22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 할 것이요
    23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19-23절에서는 초태생을 드리는 법도를 가르칩니다. 이 율법에 이어서 유월절 규정이 나옵니다(16:1-8). 출애굽기 13장 11-15절에서도 초태생을 드리는 법도와 유월절이 긴밀히 연결됩니다. 유월절은 사람과 가축의 모든 초태생들이 출애굽 전날 밤에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초태생을 드리는 법도와 유월절이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입니다. 

    초태생을 드리는 법도와 면제

    초태생을 드리는 법도는 면제와도 긴밀히 연관됩니다. 18절에서 종이 그 일에서 놓여나야 했듯이 소의 첫 새끼도 "부리지"말아야 했습니다(19절). 이 두 구절에서 사용된 단어의 어근이 아바드("일, "섬김")로 같습니다. 또한 2-3절의 독촉하다(타고스)와 19절의 털을 깎다(타고즈)가 발음이 비슷합니다. 채무자에게 빚을 독촉하는 것과 가축의 털을 깎는 것은 어떻게 보면 비슷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 다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욕심을 제어함

    초태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법은 사람의 욕심을 훌륭하게 제어합니다. 초태생을 드리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라는 인식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욕심이 제어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제어되면 채무자의 빚도 면제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맏아들이신 예수님(롬 8:29; 히 1:6)께서는 죄와 사망의 종이었던 우리가 놓여나도록 친히 몸소 하나님께 바쳐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모든 초태생들이 살아났고 죄로 인한 빚, 즉 사망을 지불해야 하는 그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이렇게 초태생을 드리라는 법은 면제와 유월절 두 가지와 긴밀하게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후하심을 드러내는 신자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백성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후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후하심을 드러냈습니다(행 2:44-47; 4:32-35). 선교적으로도 교회의 후함과 나눔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안식년과 시장경제주의

    신명기 15장에 나오는 안식년의 원리는 이 시대 시장경제주의의 우상과 맞설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현대 사회는 필요, 공급, 능력, 효율성을 무기로 하는 시장 원리를 우상처럼 받들고 있습니다. 이 시장 원리에 따라서 사람의 가치도 정해집니다. 이런 형국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원리는 바로 하나님의 후하심을 따르는 안식의 원리입니다. 나만 안식을 누린다면 그는 시장경제주의를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나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10, 18절)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을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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