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열왕기하 10장 1-17절 | 아합 집을 향한 철저한 심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

2024. 9. 21. 11:22성서유니온 매일성경/열왕기하

목차


    열왕기하 10:1-17

    찬송가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열왕기하 10장에는 바알을 숭배한 아합 집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9장에서는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세벨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10장에서는 아합 집에 속한 남자들이 처단을 당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열왕기하 9장 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10장에서는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가 멸절 당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첫 번째 멸절을 당하는 남자들은 아합의 아들 칠십 명입니다(1-11절). 그 다음 멸절을 당하는 남자들은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입니다(12-14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아합에게 속한 자들입니다(17절). 이제 11장에서는 아하시야의 아들들이 멸절을 당합니다(11:1). 이렇게 해서 아합 집에 속한 모든 남자가 멸절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요아스

    그런데 한 사람, 요아스는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11:2). 아합 집에 속한 모든 남자가 다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요아스도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하시야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11:2). 그런데 그는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열왕기하 8장 19절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아합 집에 대한 심판이 철저하게 행해졌더라면 유다도 멸망 받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다 왕실이 아합의 집에 속해 버렸기 때문입니다(왕하 8:18).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멸하지 않으시고 요아스를 남겨 두신 것은 다윗에게 하신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이 언약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다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중 얼마를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멸망 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1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아합은 번창했었습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가 칠십 명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1절의 "아들"은 손자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악인이 번창하는 것을 목도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비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악행을 반드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칠십이라는 숫자는 확장성이 있는 숫자입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갈 때 인원이 칠십 명이었습니다(창 46:27). 이 칠십 명은 나중에 장정만 육십 만 명으로 불어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서 땅의 모든 족속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받게 됩니다(창 10장- 70족속, 창 12:3). 그러므로 야곱에게 속한 칠십 명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전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합의 아들과 손자가 칠십 명이었습니다. 이들이 번창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온 땅에 바알 숭배를 만연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멸하심으로 온 땅에 악이 만연하지 않도록 막으셨습니다. 악을 제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악이 번창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악이 제어되지 않으면 결국 온 땅을 멸망시키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온 땅의 멸망을 막는 은혜입니다. 

    병법에 능한 예후

    2   너희 주의 아들들이 너희와 함께 있고 또 병거와 말과 견고한 성과 무기가 너희에게 있으니 이 편지가 너희에게 이르거든
    3   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그의 아버지의 왕좌에 두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더라

    4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 왕이 그를 당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어찌 당하리요 하고

     

    예후는 사마리아와 전쟁을 벌이지 않고 편지 한 통으로 그들을 제압합니다. 그 편지는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습니다(4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예후가 병법에 지혜가 있다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87쪽). 

    이것은 예후가 사마리아에 있는 지도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한 편지였다. ... 손무자(孫武子)의 병서(兵書)에는 말하기를 "상대방을 알고 나 자신의 실력도 잘 아는 처지에서는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더라"(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하였다. 

    칠십 명을 붙잡아 죽이고

    5   그 왕궁을 책임지는 자와 그 성읍을 책임지는 자와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지라
    6   예후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너희가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 명이 그 성읍의 귀족들, 곧 그들을 양육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7   편지가 그들에게 이르매 그들이 왕자 칠십 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

     

    예후는 편지로 아합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다 죽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이 부분 말씀을 보아도 예후는 병법에 능한 사람이어서 싸우지 않고 이기기를 계획하여 그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사마리아에 있는 왕자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하지 않고 그들의 보호자들의 손에 의하여 죽였다. 그는 적편(敵便)에 있던 자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하는데 능하였다. 예후로 말미암아 아합 가문이 전부 죽임이 된 것은 잔인한 일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비참한 죽음의 이면에는 보다 비참한 그들의 죄악이 원인으로 되어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에는 아합 왕실에 대한 예후의 숙청 운동은 하나님의 지당한 심판 행위였다. 우리는 무섭고 사정없고 또 처참한 심판 사건 앞에서는 그 사건과 관련된 자들의 죄악의 참상을 기억해야 한다. 

    악으로 악을 제어하시는 하나님

    8   사자가 와서 예후에게 전하여 이르되 그 무리가 왕자들의 머리를 가지고 왔나이다 이르되 두 무더기로 쌓아 내일 아침까지 문 어귀에 두라 하고
    9   이튿날 아침에 그가 나가 서서 뭇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
    10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11   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의 귀족들과 신뢰 받는 자들과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생존자를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예후는 뭇 백성에게 "너희는 의롭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뭇 백성은 이스르엘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의롭다고 한 것은 이들이 아합 왕실을 전멸하는데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88쪽). 그렇게 하고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라고 합니다(9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예후는 이 말로써 그의 간교하고 음흉한 성질을 드러낸 것이다. 실상은 자기가 아합 왕자 70명을 죽이도록 명령하고도 이제 와서 자기는 그 사건과 전연 관련이 없는 듯이 그들을 죽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합 왕실의 멸망이 여호와의 뜻대로 실현되었다고 하며 그것을 정당시하였다. 그는 아합 왕자들을 죽인 자를 정죄하지는 않은 것이다. 

     

    예후의 일처리는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굉장히 음흉합니다. 자기가 죽이라고 해 놓고 백성들 앞에서는 마치 자기가 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후는 악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한 사람도 선한 일에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에 사용된다는 것으로 나도 선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무익한 종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복음 전파라는 선한 일을 한다고 나도 자동적으로 선한 것이고 그래서 나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선한 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악하고 음흉한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왜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을 저 자리에 두셨을까 하면서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아해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분명히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라는 악인을 사용하셔서 이루신 선은 아합 집에 속한 사람들을 다 죽인 일이었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자주 이런 방식으로 악을 제어하십니다. 즉 악으로 악을 제어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군대를 멸절시킨 것은 바다입니다. 바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을 상징합니다. 애굽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악으로 악을 죽이신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이 죽음을 죽인 사건입니다.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도리어 죽음이 죽음을 절단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셔서 악으로 악을 제어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한하신 지혜와 선하심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12   예후가 일어나서 사마리아로 가더니 도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러
    13   예후가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14   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예후는 앉아서 승리했습니다. 그의 음흉한 계략이 통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사마리아로 향했습니다(12절). 그런데 가는 도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서 우연히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납니다. 아하시야의 형제들은 아하시야의 형제들의 아들들을 가리킵니다(대하 22:8). "목자가 양털 깎는 집"은 원어로 벧 에케드(בֵּית עֵקֶד)입니다. 여기는 이스르엘과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 있는 어떤 지명을 뜻합니다.

     

    에케드라는 말은 "얼룩얼룩한" 또는 "줄무늬를 가진"이라는 뜻의 아코드와 "묶다, 결박하다"라는 말을 가진 아카드와 연관됩니다. 이것으로 볼 때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은 겉으로는 유다에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속은 아합 집에 속한 사람들로 마치 양의 털이 얼룩얼룩한 것과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마리아를 오고간 것은 그들이 바알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거기에서 잡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14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88쪽). 

    예후로 말미암아 이들이 죽임이 된 이유는 그들이 아합 왕실의 친속(親屬)들로서 이세벨의 우상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찍부터 아합 왕실과 깊이 교통한 것이 마침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로 더불어 친근히 지내는 자들은, 마침내 그 악인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런 악인과 가까이 하지 말아야 된다(참조. 요이 1:10-11). 

     

    박윤선 목사님은 이들이 악인과 가까이 지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미 이스라엘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상 숭배에서 멀어질 기회가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아합 집 소속이었지만 어쩌면 구원의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여전히 아합 집에 속했다는 것을 그들의 행동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자기의 소속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얼룩얼룩하면 안 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만 섬기고 경외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회개한 사람은 인간 관계가 새롭게 정립됩니다. 이전에 어울렸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인간 관계가 생깁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의 권속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가족으로 맺어지는 인간 관계입니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예후는 아합에게 속한 남자들을 멸절시키는데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자기가 유능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욱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보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더욱 경외해야 합니다. 

     

    아하시야의 형제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심판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통과하고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들입니다. 

    여호나답을 만난지라

    15   예후가 거기에서 떠나가다가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난지라 그의 안부를 묻고 그에게 이르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하니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르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16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17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에 남아 있는 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레갑"은 겐 족속에 속한 사람입니다.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88쪽). 

    "레갑"은 겐 족속에 속하였는데(대상 2:55), 모세의 장인이 이 족속에 속하였다(민 10:29). 이 족속은 사치와 방종을 피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엄격한 경건(敬虔)을 유지하려고 유목 생활을 택하였다(참조. 삿 1:16; 4:11).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경건의 모본으로 들어 타락한 유대인들을 경고하기도 하였다(참조. 렘 35장). 

     

    예후는 여호나답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마음에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후는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라고 하면서 그를 자기의 병거에 태웁니다(15절). 그렇게 하고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라고 말합니다(16절). 여기에서 예후의 악함이 드러납니다. 예후는 자기에게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인식으로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우리는 이것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전능감" 또는 "자기 유능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능하거나 전능해서 일을 이루고 성취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서 일을 성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으니

    자기 부인

    박윤선 목사님은 예후가 여호나답을 높인 이유가 "자기의 혁명이 경건을 위한다는 인상을 민중에게 주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89쪽). 예후는 병법에도 능하고 정치에도 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정치적인 술수를 잘 썼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썼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이 유능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출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자기부인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마 16:24; 막 8:34; 눅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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