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8. 18:05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애가
목차
예레미야애가 1:12-22
찬송가 274장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예레미야와 예수님
예루살렘 성은 심판을 받아 불타고 그곳의 주민들은 사로잡혀갔습니다. 그렇게 되어 성은 적막하게 되었습니다(1:1). 예루살렘 성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심판을 받아 철저하게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소망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 성을 위해 기도하는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9, 11). 그 선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예레미야라고 했습니다(마 16:14). 실로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에 심판을 말씀하셨고(마 23:37; 눅 13:34)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2:31-32).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예레미야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묻습니다. 이 물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내린 심판을 보고 자긍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사람은 숙연해지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가 당하는 고통과 내가 전혀 상관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여호와의 진노를 촉발합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라고 말하는 선지자의 외침에 나는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유다가 당한 심판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우둔하게 된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롬 11:25).
박윤선 목사님은 12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61쪽).
선지자가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여기서 심히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민족이 그런 심한 환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다 민족이 이런 환난을 받은 것은 참 놀랄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으니,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더욱 징계하신다는 것이다(잠 3:11; 히 12:7). 선지자는 이 진리를 아는 고로 본절 하반절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예레미야의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당하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그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합니다. 순순히 받고 괴로워하면서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징계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진노
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라고 하면서(12절) 이어지는 절에서(13절)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셨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고통은 위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입니다. 마치 골수가 불타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 여러 곳에서 타는 불로 표현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집들이 다 불에 탔습니다(왕하 25:9). 그런데 그것은 예레미야에게 남의 일이 아니고 자기의 골수가 불에 타는 것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도성을 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레미야가 당한 고통은 중보자로서 당한 고통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선지자는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라고 한탄합니다. 발 앞의 그물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유다 민족으로 하여금 어찌할 수 없이 굴복하도록 무적의 환난을 "그물"과 같이 폈다는 것이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62쪽). 하나님께서 환난을 내리실 때에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러가게 하실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이것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물을 쳐서 물러가게 하시는 것은 사람이 악으로 치달아 가는 것을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악했다는 것이 아니고 유다가 그렇게 죄악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유다와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라고 탄식합니다(13절 하).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그가 환난에 처하여 기쁨이 없고 병들었다("피곤")는 뜻이다. 이것은 환난 때문에 심히 쇠퇴하여진 유다 민족의 정지(情地, 딱한 사정에 있는 처지)를 기리키는 시적 표현이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애가 주석, 662쪽). 유다 민족은 고향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쫓겨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품이 얼마나 아늑했는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품에서 쉼을 누린 것이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쫓겨나면 피곤함과 황폐함 밖에는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황폐하게 합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내 죄악의 멍에를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선지자는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라고 탄식합니다. 이것도 유다 민족의 환난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곧, 유다 민족이 당한 환난이 그 민족이 범한 죄악을 원인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멍에를 그 목에 얽어매듯이 죄악의 짐이 이제 그 민족에게 부담되어 어찌할 수 없이 되었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62쪽). 이 탄식은 예수님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과 동일시 되셨습니다. 당신님의 백성을 당신님의 목에 멍에를 메듯이 메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쉼을 얻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넘어가게 합니다. 이 시에서 감당할 수 없는 자는 일차적으로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품에 거할 때에는 바벨론이 우습습니다. 하지만 죄에 빠지면 바벨론이 우리 위로 올라가 버립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몽둥이이기도 합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언제든지 돌이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켰던 것처럼 우리에게 징계가 내려지는 그 때에 하나님께 돌이킬 기회가 주어집니다.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유다는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넘어갔습니다(14절). 유다에는 용사들이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성회를 모아"에서 성회는 모에드(מוֹעֵד)입니다. 모에드는 "정한 때, 또는 정한 장소, 모임(appointed time, place, or meeting)"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회를 모아"는 정한 때에 정한 장소에서 청년들을 부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다를 ... 술틀에 밟"는 것과 같았습니다. 술틀에 밟는다는 것은 포도를 포도주틀에서 짓이겨서 즙을 내듯이 그렇게 짓이겼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만큼 철저하게 부수셨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그 의뢰하는 것을 철저하게 부수십니다. 짓이기십니다. 그렇게 하셔서 우리가 의뢰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믿는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의뢰하던 것이 철저하게 부서지는 것을 봅니다. 그 때 우리는 그것이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의뢰할 분을 의뢰하게 하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선지자는 자기가 운다고 합니다. 선지자가 슬퍼하여 우는 것처럼 유다 민족도 마땅히 슬퍼하며 울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의 징벌로써 내린 환난 앞에서는 사람들이 마땅히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임한 고통이야말로, 원망과 불평으로 대하지 않는 자에게는 참다운 회개를 이루게 한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63쪽).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을 떠나시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비참을 초래합니다. 사람으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비참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원수들이 이깁니다. 그 결과는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입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예루살렘의 거주자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만 채우실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은 깊은 외로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에는 깊은 외로움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깊은 충족감과 만족감, 충만함을 느낍니다. 모든 만족의 근원도 하나님이십니다.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영광스러운 도시였는데 심판을 당하여 모든 사람이 꺼리는 불결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더러운 것을 멀리합니다. 그런데 시온이 바로 그런 더러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꺼리는 것이 된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누가 그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있을까요? 놀라운 것은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그를 품에 안으시고 정결하게 하시어 그를 받아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불결하다고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님의 피로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여호와는 의로우십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통은 거기에서부터 옵니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신데 사람이 악한 것입니다. 사람이 악해서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고통이 옵니다. 그 고통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고통이 있고 하나님과의 단절이 있습니다.
선지자가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663쪽).
고통 중에 있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벌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귀한 회개의 심리이다. 다윗도 죄를 인하여 징계를 받는 중에서도 말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라고 하였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유다 민족의 회개 심리를 대신 표현시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자기의 범한 죄와 관련되었다는 의미로, 또 다시 그 민족의 처참한 수난 광경을 애처롭게 묘사한다. 곧,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라고 한다.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문제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한 것에 있다는 것에서 회개가 시작됩니다. 겸손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에 의하면 19절의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은 애굽을 가리킵니다.
애굽은 유사시에 유다를 돕기로 약속했었으나, 막상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당한 때에는 유다를 돌보지 않았다. 이렇게 유다 민족이 믿었던 대로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아픈 사실이다.
애굽은 유다를 속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속인 것은 그들에게 유다를 구할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자주 속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어떤 의지처를 생각할 때 그가 나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나를 도울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위기에 들어가면 그것이 나를 도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나를 속인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나를 도울 능력이 있는 이를 의지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도울 능력이 있으신 단 한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도 양식을 구해야 하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들도 성읍 가운데서 기절할 수밖에 없었던 연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64쪽).
가정에 환난이 임했을 때 부모가 없는 고아들이야말로 측은하기 그지없다. 나라는 망하여 가는데 진정한 우국지사(憂國志士)나 지도자가 없는 때에 그 백성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프다. 유다 민족이 바벨론의 침략을 당했을 때에 그 민족의 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이 다만 자기들의 연명(延命)을 위하여 식물(食物)을 구하기에만 급급하였다. 이것이 거짓 지도자들의 말로(末路)를 잘 말하여 준다. 그들은 본래부터 식물을 구하는 자들이었을 뿐, 진심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찾던 자들은 아니었다. 평안한 때에는, 그들이 이런 흑막을 잘 가리고 나서서 어디까지나 남들을 위하는 지도자인듯이 자처하였다. 또 그들은 그 때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본색이 탄로 날 어느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 시드기야와 유다의 고관들은 친애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선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항전하는 투사들로 비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진정 백성을 위했다면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돌이켰을 것입니다. 진정 살 길을 선택하여 바벨론 왕의 멍에를 받아들이고 달게 멨을 것입니다. 바벨론에 항전하는 것이 용기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는 것이 진정한 용기였습니다. 그들의 본색은 결국 탄로나고 말았습니다. 거짓 지도자의 본색은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참된 지도자로 거짓이 없으신 우리 주 예수님만 지도자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선지자는 "여호와여 보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보십니다. 예루살렘이 당하는 환난도 보시고 감찰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를 자기의 반역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예루살렘을 자기와 동일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는 밖에서도 안에서도 죽음을 경험합니다. 밖에서는 칼이 나의 가장 소중한 것, 즉 "내 아들"을 빼앗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도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집 안에는 죽음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반역한 자가 당하는 형벌입니다.
우리는 항상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반역의 종자임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의 법으로 사로잡혀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에서 건지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만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롬 8:1). 정죄를 당하지 않는 사람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우리 죄에서 건지실 수 있으십니다.
원수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예루살렘의 고통을 보며 원수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65쪽).
선지자는 여기서 그 환난 중에 위로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환난 당함을 기쁘게 생각하는 원수들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원수들의 보응 받을 사실을 내다보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심패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을 벌하신다(잠 24:17). 그러므로 성도는 남의 실패를 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롬 12:19, 20), 자기 자신도 그렇게 될까 두려운 마음으로 지날 뿐이다(참조. 갈 6:1).
남의 실패와 고통, 특별히 원수의 실패와 고통은 사람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줍니다. 이것이 사람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런 것이 올라올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런 죄된 감정에 휩싸이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심에 감사하며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원수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처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겸손함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만이 살 길임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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