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애가 1장 1-11절 | 멸망 당한 예루살렘

2024. 10. 17. 22:02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애가

반응형

목차


    예레미야애가 1:1-11

    찬송가 544장 울어도 못하네


    서론

    예레미야애가는 원어로 "에카(אֵיכָ֣ה)"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אֵיךְ)는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로 "어찌하여"라는 뜻입니다. 당면한 재앙에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탄식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 예레미야애가라는 책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22개 알파벳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이를 답관체 형식이라고 합니다. 답관체(踏冠體) 머리를 밟아가는 문체라는 뜻으로 하나의 시에서 행이나 연의 첫머리에 알파벳 순서로 된 단어가 규칙적으로 등장하도록 배열한 문체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70인 역은 예레미야애가를 예레미야 다음에 놓으면서 그 제목을 예레미야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유대전통과 초대교부들은 이 책의 저자를 예레미야로 보는데 동의합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진 바로 다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주전 586-575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언약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향한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하나님 묘사와 함게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인 묘사도 많이 등장합니다(1:12; 2:15-16; 3:14; 3:19).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예레미야애가는 놀라운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애가는 "슬프다"로 시작합니다. 이 슬픔은 예루살렘 성이 파괴된 슬픔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적막하게 되었습니다. 성전과 왕궁과 그 안에 있는 집들이 다 불타서 없어졌습니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왕하 25-9-11). 예레미야는 그 장면을 다 보았고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누구보다 예루살렘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슬픔을 표현한 것에 그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끝까지 저항했던 시드기야와 고관들 때문에 예루살렘 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열국 중에 크던 자"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의 명성은 드높았습니다. 그러한 명성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복을 주시고 거기에 거하셨기 때문에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도성이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습니다. 곱게 자란 공주 같았던 도성이 이제는 강제 노역을 하는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노역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자처럼 된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1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57쪽). 

    선지자는 그 민족을 대표하여 그 당면한 고통 중에서 죄감을 심각히 느끼도록 만드는 환경을 묘사한다. 이제 이 비참한 정경을 묘사함에 있어서 그는, 머리말에 "슬프다"(אֵיכָ֣ה/에이카)로 시작한다. 이 표현은 실상 "슬프다"로 번역되기 보다는 "어떻게"로 번역됨이 옳다. 곧, 유다 민족의 처지가 저렇게 도탄 중에 떨어진 것이 웬일인가 하는 탄식이다. 그런 비참한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징계라고 해야만 바로 해석된다고 암시한다. 사람의 처지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급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되는 법이다. 이렇게 죄를 생각하게 하는 참상에 대하여 선지자는 이 아래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위로하는 자가 없고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예루살렘은 밤에도 슬피 웁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그 슬픔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곧, 슬픈 자도 밤에는 잠드는 법인데 그때에도 애국한다고 여기 말한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658쪽). 울어서 눈물이 뺨에 흐릅니다. 이것은 시적인 묘사입니다. 눈물로 흐르는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슬퍼하건만 그를 위로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여기 나온 친구를 유다 민족이 의뢰하던 애굽이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58쪽).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벌하실 때에, 그들이 이때까지 하나님 대신으로 믿던 모든 것을 없게 하시는 법이다(사 3:1). 의지하던 대상이 없어진 사실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던 죄악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십니다. 참된 위로자는 우리를 비참에서 건져주십니다.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는 모든 것이 우리를 배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이 다 헛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능력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능력으로도 신실함으로도 우리를 배반하지 않으시고 참된 위로를 주시고 우리를 건져주실 수 있으십니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
    예루살렘 통곡의 벽, 출처: 구글지도

    하나님 앞에서 쫓겨남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 것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큰 고통을 받으면서 그들은 잡혀간 것입니다. 그들은 열국 가운데 거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했습니다. 핍박하는 모든 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잡히고 궁지에 몰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58쪽). 

    본절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 된 사건을 전후하여 당하는 고난들을 묘사한다. 그것들은 "환난", "수고", "평강을 얻지 못함", "핍박" 등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이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 사실도 역시 그들의 죄를 기억시키는 것이다. 그런 참상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유다가 겪은 환난과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겪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 쉬지 못할 때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시온의 도로들은 절기를 지키러 오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그 안의 모든 집들이 불에 탄 지금은 그 누구도 올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58쪽).

    여기서는 종교적 불경기(不景氣)에 대하여 묘사한다. 전에는 유다 백성이 종교적 절기를 지키느라고, "시온의 도로"가 사람들로 찼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 도로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믿는 종교에 있어서 은혜가 없고 적막한 처지에 빠지게 됨도 역시 그들의 죄를 생각하게 하는 참상이다.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죄는 원수를 흥하게 합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나의 대적이 나의 머리가 됩니다. 나의 원수가 형통합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시는 방법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이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자녀가 대적에게 사로잡힙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가 괴롭힘을 당하는데 나의 원수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6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갔다고 합니다. 영광이 떠나는 것도 죄의 결과입니다.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나라가 부강해집니다. 지도자들에게 힘이 있게 됩니다. 지도자들의 힘이 빠지고 쫓기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지도자는 그 나라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시면 그 영광도 빼앗깁니다.

    돕는 자가 없었고

    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예루살렘은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할 때에야 비로소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믿는 자는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것을 빼앗기고 나서야 그것이 좋았음을 압니다. 

     

    백성들이 대적의 손에 넘어질 때 그를 돕는 자가 없는 것도 심판입니다. 대적은 의기양양해져서 그의 멸망을 비웃는다고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그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을 생각할 때에는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있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없신여김이여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예루살렘에게 영광을 돌리던 사람들이 업신여긴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됩니다. 죄는 이토록 무섭습니다. 죄를 지으면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탄식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죄를 지을 때 걸리지 않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걸리지 않는 죄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의 벗었음"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59쪽). 

    유다 민족이 범죄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불결한 자처럼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이 자기 변호에 의해 남들에게 잘 보였다.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필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셨다. 여기에 따라 그들이 비참해진 광경은, 그들이 범했던 죄악의 추태를 남들에게 드러내어 보인 셈이다.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죄를 지으면 그 더러운 것이 옷깃에 묻어 있습니다. 옷깃에 묻어 있다는 것은 그 행실에 그 죄가 다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죄를 들키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죄는 그 사람의 얼굴과 표정과 몸짓에 다 드러납니다.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이 말씀은 그렇게 죄가 쌓이면 나중에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사람은 갑자기 낮아집니다.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59쪽). 

    "놀랍게 낮아졌다" 함은, 너무도 갑자기 그들의 처지가 바뀐 사실을 보여 준다. 높던 자가 정반대로 낮아진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이다. 곧,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라고 한다. 이것은 유다 민족의 죄악이 옷깃에 나타난 것처럼 노골적으로 탄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그들이 그 받을 벌을 생각하여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죄와 벌에 대하여 무감각했으며 철면피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죄악이 관영(貫盈, 꿸 관, 찰 영)한 때에는 벌이 따른다. 그러므로 유다 민족은 필경 "놀랍게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곧, 바벨론의 침략을 당했다. 

    선지자는, 민족을 대표하여 그 받는 환난의 참상이 죄 값임을 이렇게 바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런 처지에서는 진정한 회개가 나오며,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선지자는 이 점에 이르러 그 민족을 대신 표현시킨다. 

     

    박윤선 목사님이 주석한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한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원수의 능력이 크기 때문에 유다가 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원수는 자기를 높이며 스스로 큰 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소할 만한 것입니다. 이 호소와 함께 예레미야는 나의 환난을 감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원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서 동시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죄의 결과를 마주대하며 받는 고통을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죄를 지어 심판을 받는 중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막아

    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가 성전의 모든 보물을 약탈해 간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아룁니다. 주의 성회는 거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거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믿고 함부로 침범하여 성소에 들어가 보물을 약탈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60쪽).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런 슬픈 사실이 발생된 원인이다. 거룩한 것이 이방인의 침범을 당하게 되는 것은, 어떤 때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들이 그 거룩한 것들을 바로 취급하지 않는데 그 원인을 가진다. 혹 하나님보다도 그 성물들을 자랑하여 의지하는 것과 같은 그들의 죄악이, 그 원인을 성립시킨다. 유대인들은 그때에 종교를 외식으로 가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행치 않고 성전의 외부적 시설을 하나님 대신 신성시하여, 그것 때문에 외적(外敵)의 침해를 면할 수 있는 줄로 생각했다(참조. 렘 7:3). 

    선지자는 이 말을 하는 가운데도 역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죄악을 무언중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악을 막아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보호는 언제나 징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가는 것을 절대 방치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성전이 건재하는 한 예루살렘은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누구보다 그들의 죄악상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는 더더욱 그것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나는 비천하오니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예루살렘은 장시간 포위되었습니다. 그래서 성 안에는 먹을 것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심하게 굶주렸습니다. 그 어떤 보물도 생명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사람의 눈을 가립니다. 무엇이 진정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각자의 보물을 쌓아놓기에 혈안이 됩니다. 그러나 재앙이 닥치면 보물이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보물로 먹을 것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음식을 더 사랑한다는 뜻도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61쪽). 

    그들이 하나님보다도 음식물을 더 사랑하여 그것을 너무 의지하기 때문에(겔 4:!6),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벌을 내리신다. 양식이 핍절된 자는 하나님보다 양식을 더 좋아했던 죄악을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이 말씀을 보아도, 선지자가 비록 극도의 국난(國難)에 대하여 탄식하면서도, 낙심하는 것은 아니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신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낙심은 죄악이요, 낙심에 빠진 자는 기도를 못하는 법이다. 

     

    모든 것이 빼앗겼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지를 알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 살 수 없음을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 신자는 얼른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낙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처럼 낙심은 죄악입니다. 스스로 비천하다고 느낀다면 그 마음 그대로, 그 상한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