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2. 23:5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애가
목차
예레미야애가 3:19-39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기억하소서
예레미야애가는 답관체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22개를 첫 글자로 사용한 것입니다. 19절부터 나오는 첫 글자는 자인입니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19절은 자카르(זְכָר)로 시작합니다. 자카르는 "기억하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내 고초와 재난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쑥은 쑥을 뜻하고 담즙(רֹאשׁ)은 독, 독초이라는 뜻입니다. 둘 다 쓴 것을 가리킵니다. 고난은 쓰디 씁니다.
20절은 자코르(זָכ֣וֹר)로 시작합니다. 자코르는 "기억하다"를 의미하는 자카르(זָכַר)의 부정사형입니다. 이 부정사형은 강조형으로 쓰였습니다. 즉, 나의 영혼이 확실하게 기억하고 낙심되었다는 뜻입니다. 쓰디 쓴 고난은 잊을 수 없습니다.
21절은 조트(זֹ֛את)로 시작합니다. 조트(זֹאת)는 여성 대명사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직역하면 이것을 내가 나의 마음 위에(אֶל־לִבִּ֖י) 돌아오게했다(שׁוּב의 히필형) 입니다. 여기서 여성 대명사가 가리키는 것은 20절의 내 영혼(נַפְשִֽׁי)입니다. 20절에 나온 마음은 히브리어로 네페쉬(נֶפֶשׁ)이고 21절에 나오는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לֵב)입니다. 네페쉬는 영혼, 생명, 생명이 있는 존재, 자아, 인격(a soul, living being, life, self, person, desire, passion, appetite, emotion)이라는 뜻이고 레브는 내면의 존재, 지성, 마음, 의지, 심장(inner man, mind, will, heart)이라는 뜻입니다.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해석하자면 "나의 고난 당한 영혼을 나의 마음에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나는 소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가 됩니다. 내가 무엇을 소망하게 하는가 할 때 그것은 21절 서두에 나오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영혼입니다. 20절에서 낙심이 된 영혼을 내가 내 마음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그 영혼을 소망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은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이 쓰디 쓰기 때문에 생명이 끊어지는 것처럼 낙심이 됩니다. 숨통이 끊어지고 모든 소원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영혼이 죽어갈 때 그 영혼을 잡아서 마음에게 돌아오게 합니다. 즉 마음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영혼으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무엇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선지자가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요? 2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2절부터 24절은 헤트로 시작합니다. 22절은 하스데(חַֽסְדֵ֤י)로 시작합니다. 하스데는 헤세드(חֵסֵד)의 연계형입니다. 헤세드 뒤에는 여호와가 나옵니다. 헤세드는 우리말 성경으로 인자, 인애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여호와의 인자라는 뜻입니다. 인자(헤세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인자를 생각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를 생각하면서 선지자는 여호와의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긍휼이 무궁하다에서 무궁하다는 칼라(כָּלָה)의 부정형입니다. 즉 칼라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칼라는 다하다, 끝에 이르다, 끝난다, 다 소비되어 없어진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긍휼은 절대 끝날 수 없다, 다할 수 없다, 없어질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진멸된다는 말은 원어로 타맘(תָּמַם)인데 이 말은 끝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긍휼(רַחַם, compassion)과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 존재가 다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이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끝장날 수 없습니다. 절대 멸망으로 운명지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존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3절은 하다심(חֲדָשִׁים֙)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חָדָשׁ)은 "새로운"이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선지자는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기 때문에 사람의 존재가 아침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주의 성실하심이 크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성실하심(אֱמוּנָה)은 확고함, 믿을 수 있음(firmness, steadfastness, fidelity)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아멘과 동족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십니다. 즉 거짓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많다(רַב)고 합니다. 우리 말로는 이것이 크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셀 수 없이 기록된 역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성취된 역사입니다. 신명기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다 성취되었습니다.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이미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 분이신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무궁하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생각하고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2절)"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4절은 헬키(חֶלְקִ֤י)로 시작합니다. 헬키는 나의 기업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업(חֵלֶק)은 몫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무리의 사람들이 어떤 큰 것을 얻었을 때 각자에게 몫을 나누어 준다고 할 때 그 몫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나의 몫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에게 주신 분량, 자기의 것으로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나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영혼(נַפְשִׁ֔י)에게 여호와께서는 나의 기업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나는 그 여호와를 바랄 것이라고 합니다. 24절의 바란다는 말은 21절에 소망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21절에서 영혼으로 하여금 소망할 수 있게 했는데 누구를 소망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 나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에게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선지자는 나의 몫이라고 하고 그분의 인자하심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긍휼은 한이 없기 때문에 나의 존재 또한 다함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기의 존재를 묶고 하나님을 소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행하신 분을 압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리심을 처절하게 경험하면서도 여호와를 끝까지 믿으시고 당신님의 존재를 여호와의 긍휼에 묶으시고 당신님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셨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믿음을 받으시고 예수님의 소망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부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아지시고 가장 높아지셨습니다. 이 일은 다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똑같이 죽음의 순간에 우리 몫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바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5절부터 27절까지는 테트로 시작합니다. 25절은 토브(ט֤וֹב)로 시작합니다. 토브는 "좋다, 선하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기다리면서 그를 찾는 영혼들에게 선하시다고 합니다. 구한다는 것은 찾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분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기다리면서 계속 찾고 추구해야 하는 분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자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좋은 분이십니다. 선하신 분으로 임하십니다.
26절도 토브(ט֤וֹב)로 시작합니다. 26절은 여호와의 구원을 향하여 몸을 빙빙 돌면서, 또는 비틀면서 잠잠한 것이 좋다고 합니다. 몸을 빙빙 돌거나 비튼다는 것을 우리말로는 기다린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원어에는 기다리는 모양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누구든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으면 몸이 자꾸 비틀어집니다. 빙빙 제자리를 돌게 됩니다. 그렇게 뭔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참으면서 잠잠하게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27절도 토브(ט֣וֹב)로 시작합니다. "사람"이라고 번역된 말은 장성한 남자라는 뜻입니다. 힘센 용사라는 뜻도 됩니다. 장성한 남자에게는 그가 어렸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멍에 메는 법을 배우면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어서 한 고생이 장성했을 때 유익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멍에는 여호와께서 메우시는 멍에입니다(28절). 그러므로 이 멍에는 유익한데 왜 유익하냐면 사람의 성공을 위해서 유익한 것이라기 보다는 순종을 배우기 때문에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히 5:8). 그렇게 하셔서 당신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 5:9)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28-30절은 요드로 시작합니다. 28절은 예셉(יֵשֵׁ֤ב)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앉는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멍에를 메우실 때 그 멍에는 "나"를 위한 멍에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대신 질 수 없고 오로지 "나"만 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혼자 앉았다. 그리고 잠잠했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의 죄라는 멍에를 메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신 멍에,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 지실 수 밖에 없는 짐이었습니다.
29절은 이텐(יִתֵּ֤ן)으로 시작합니다. 이텐은 "그가 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그의 입을 티끌 안에 줄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티끌(עָפָר)은 땅의 마른 흙, 또는 먼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앉아서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소망이 있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30절도 이텐(יִתֵּ֧ן)으로 시작합니다. "그를 치는 자에게 뺨을 줄 것이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말은 "치욕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이 일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일입니다.
본심이 아니시로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1절부터 33절까지는 카프로 시작합니다. 31절은 키(כִּ֣י)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그렇게 입을 멍에를 순순히 메고 앉아서 엎드려 입술을 티끌에 대고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대고 치욕으로 가득차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그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매우 심하여 영원할 것 같지만 고난은 지나가는 것이요 주께서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니 영광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32절도 키(כִּ֣י)로 시작합니다. 32절도 이유를 말합니다. 32절에서 말하는 이유는 비록 그가 고통을 받게 하시지만 그의 인자하심(רָחַם)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은 헤세드가 아니고 라헴(רָחַם)입니다. 라헴은 사랑이라는 뜻인데 특별히 긍휼이 넘치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긍휼이 가득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구원을 소망할 수 있다(26절)는 것입니다.
33절도 키(כִּ֣י)로 시작합니다. 여기도 이유를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의 아들들(인생으로 번역됨)을 고생하게 하시는 것은 그의 마음으로부터 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로 고통을 받게 하고 싶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마음에 원하셔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복을 누리며 살기를 마음에 원하셨지 그들이 고통 다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타락하여 스스로 악한 지경, 고통을 받는 지경으로 들어갔습니다(34-39절).
사람의 죄
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4-36절은 라메드로 시작합니다. 34절은 레다케(לְדַכֵּא֙)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으스러뜨리는 것(to crush)"입니다. 34절을 직역하면 "땅위의 모든 갇힌 자들을 발 아래 으스러뜨리는 것"입니다.
35절은 레하토트(לְהַטּוֹת֙)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굽히는 것"입니다.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재판(מִשְׁפַּט)을 임의로 기울게 하는 것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36절은 레아우트(לְעַוֵּ֤ת)입니다. 뜻은 "비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송사를 비뚤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주께서 보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이루신다, 승인하신다, 이런 뜻인데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승인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34-36절이 바로 택하신 백성들 안에 있었던 죄악들이고 하나님께서 절대 승인하시지 않으시는 것들입니다.
어찌 원망하랴
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37절에서 39절은 멤으로 시작합니다. 37절은 미(מִ֣י)로 시작합니다. 미(מִ֣י)는 "누가"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명령은 원어로 차바(צָוָה)인데 성경 여러 군데에서 계명이라고 번역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계명에 다 기록이 되어 있고 기록된 대로 일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38절은 미피(מִפִּ֤י)로 시작합니다. 뜻은 "입으로부터"입니다. 직역하면 "악한 것들과 선한 것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선한 것에 대한 상급과 악한 것에 대한 벌을 말씀하셨습니다.
39절은 마(מַה)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왜, 어찌하여"입니다. 선지자는 그가 어찌 원망하느냐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사람인데 바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이 말은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원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 내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긍휼이 무궁하십니다.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시고 긍휼에 넘치는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을 당하여 쓰디 쓴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아주 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지 하나님께서 재앙 내리기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그런 무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기를 기뻐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기뻐하지 않으시는 그 일을 행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도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고통을 다 체휼하시는 긍휼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고통을 체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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