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5. 20:57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애가
목차
예레미야애가 4:1-10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예레미야애가는 답관체(踏冠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형식은 히브리어 알파벳이 순서대로 맨 첫 글자에 등장하는 형식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22개입니다. 22개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서 1장, 2장, 4장, 5장은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3장은 하나의 알파벳이 세 개의 절에 사용되기 때문에 총 66절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1절의 시작 글자는 알렙입니다. 1절은 에이카흐(אֵיכָה֙)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의문사로 "어떻게"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탄식을 표현한 말입니다. 맨 처음 나오는 말은 "어찌하여 그것이 어두워졌는고?"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빛을 잃었다고 번역되었습니다.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순금, 아주 좋은 순금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이 금과 순금은 성전에 있는 금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성전이 그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성소의 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소의 돌들은 성전을 구성합니다. 이 돌(אֶבֶן)이라는 말은 건축하다(בָּנָה)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돌(에벤)과 건축하다(바나)라는 말은 아들(벤 בֵּן)이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합니다(삼하 7:14 참조). 그러므로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다는 것은 성전을 구성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했던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다는 의미도 됩니다.
믿는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로 선택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두워져서 죄를 짓고 하나님을 적대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지게 된 것입니다(엡 2:22).
아들들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2절의 시작 글자는 베트입니다. 2절은 브네(בְּנֵ֤י)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아들들"입니다. 앞에서 "돌"과 "아들"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했는데 바로 2절에서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1절의 해석은 정당합니다. 성소의 돌들이 거리에 쏟아졌다는 것을 2절에서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금과 같이 보배롭고 가치있는 시온의 아들들이 토기장이가 손으로 만든 진흙 항아리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선지자는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는가!"라며 탄식힙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그릇을 원하시는 대로 만드실 권한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 18:6). 즉,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실 수 있으시고 반대로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이 일을 전횡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 18:8)"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 민족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행하신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롬 9:21-23).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만약 어느 민족이 돌이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백성 아닌 우리들을 "내 백성이라" 하셨습니다(롬 9:25). 반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한 유대인들은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롬 9:30-31).
여기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롬 11:22-23)" 믿지 않는 데에 머무르지 말고 믿음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3절의 시작 글자는 김멜입니다. 3절은 감(גַּם)으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심지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들개들도 젖을 주어서 그들의 새끼를 먹이는데 딸 나의 백성은 잔인해서 광야의 타조와 같다고 합니다. 타조는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는 짐승입니다(욥 39:13-17 참조). 광야의 타조 같다는 측면이 4절에도 이어집니다.
혀가 붙었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4절의 시작 글자는 달렛입니다. 4절은 다바크(דָּבַ֨ק)로 시작합니다. 다바크는 "그것이 붙었다"라는 뜻입니다. 젖먹이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음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젖먹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아서 아기가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비참한 상황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들이 밥을 달라고 하는데 자기 밥을 나눠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타조처럼 잔인하다는 말(3절)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오랫동안 포위했기 때문입니다. 성 안에 먹을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 이기적이 되어 자기밖에 모르는 비참한 상황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말씀에 배가 고픈 상황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서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과히 말씀의 홍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적으로 배부르게 공급을 받는 사람은 드뭅니다. 말씀을 들어도 더 갈급해지는 이상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굶주려 있다는 것은 교회마다 분란이 일어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잔인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성도들은 3-4절에 나오는 것처럼 어린 신자들에 대해서 더욱 잔인해집니다. 이것은 교회가 말씀에 굶주려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면 왜 말씀에 굶주릴까요? 성도들마다 말씀을 공급 받아 자라야 하는데 자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말씀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젖을 먹어야 하는 처지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히 5:12).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그렇습니다(고전 3:1-4). 이런 폐단을 돌파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는 신령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잘 전하고 성도는 그 말씀을 착하고 순한 마음으로 받아 마음에 간직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 사상 체계가 형성되면서 점점 커져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을 장성하게 하는 교회가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5절의 시작 글자는 헤입니다. 5절은 하오컬림(הָאֹֽכְלִים֙)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사람들이 처량하게 거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식탁에서 교제하면서 즐겁게 식사하던 장면에서 혼자 거리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장면으로 변한 것입니다.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 즉 비싸고 좋은 옷을 입고 귀하게 자란 사람들이 거름더미를 안았습니다. 여기서 거름더미(אַשְׁפֹּת: an ash heap, refuse heap, dunghill)는 잿더미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거름더미를 안았다는 것은 귀하고 높은 신분에서 낮고 천한 자리로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어떻게 비참해졌는지가 나옵니다. 근느 아들의 신분에서 돼지를 치는 자로 낮아졌습니다.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지 않는 처지로 급강하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롭게 살고 즐거울 것 같지만 그 반대입니다. 존귀한 신분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소돔의 죄악보다 컸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6절의 시작 글자는 바브입니다. 6절은 바익달(וַיִּגְדַּל֙)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그리고 그것은 컸다"라는 뜻입니다. 이 크다는 말은 "매우 크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매우 크냐면 딸 내 백성의 죄악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심지어 소돔의 죄보다 훨씬 크다고 합니다. 소돔은 그 죄가 매우 커서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진 성읍입니다. 그 성읍보다 예루살렘 성의 죄가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죄가 소돔의 죄보다 훨씬 큰 것은 예루살렘이 여호와께서 보내신 종, 선지자들을 매우 많이 죽였기 때문입니다(마 23:37-39 참조). 거기에다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죽였습니다(마 21:38-39 참조). 이 죄는 그 어떤 죄보다 매우 큰 죄입니다.
빛나던 사람들이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7절의 시작 글자는 자인입니다. 7절은 자쿠(זַכּ֤וּ)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그것이 (순수하여) 빛난다"라는 뜻입니다. 순수하여 빛나던 사람들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존귀한 자들"은 히브리어 원어로 나실인(나지르 נָזִיר)입니다. 나실인은 자기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뜻합니다(민 6:2 참조). 이 나지르를 "존귀한 자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창세기 49장 26절에서 요셉을 존귀한 자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거기에서도 요셉을 나지르라고 합니다. 나실인과 요셉이 존귀한 자인 것은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모든 면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의 귀함은 오직 우리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어두워졌다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8절의 시작 글자는 헤트입니다. 8절은 하사크(חָשַׁ֤ךְ)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그것이 어두워졌다"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빛나던 존귀한 자들(7절)의 외모가 숯보다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포위를 당하여 임한 기근 때문에 먹지를 못해서 가죽이 뼈에 붙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물리치시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 순서를 거꾸로 돌려버립니다. 빛나던 사람들을 어둡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전에는 밝았으나 지금은 뭔지 모르게 어두워졌다면 속히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여기서는 기근이 빛나던 사람들을 어둡게 했습니다. 이 기근도 죄에 대한 심판으로 임한 것입니다.
칼에 죽는 것이 낫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9절의 시작 글자는 테트입니다. 9절은 토빔(טוֹבִ֤ים)으로 시작합니다. 토빔은 "좋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칼에 죽는 것이 배고파서 죽는 것보다 좋다고 합니다. 정말입니다. 굶어서 죽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그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이미 레위기와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10절의 시작 글자는 요드입니다. 10절은 여데(יְדֵ֗י)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두 손"입니다.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두 손으로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신명기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신 28:56-57)" 이 일은 이미 신명기에 기록된 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미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견했는데 그 원인은 택함을 입은 백성들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신 28:58)"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 즉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은 사람을 이런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갑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사람들이 그런 지경까지 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모르고 끝끝내 반역 가운데 죽게 되면 이런 일보다 훨씬 비참한 일을 당하는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러한 비참함 가운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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