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9. 16:16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48:26-35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술과 술 취함
앞에서는 모압을 술에 비유했습니다. 담근 후에 한 번도 옮겨지지 않은 술에 비유한 것입니다(48:11-12). 하나님께서는 그 술을 옮기듯이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압의 모든 도시가 다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모압이 술에 취한 것으로 비유됩니다(26절).
교만함이라
26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거리가 되리로다
27 네가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도둑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느냐 네가 그를 말할 때마다 네 머리를 흔드는도다
모압이 심판을 당하는 이유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한 것은 마치 토한 것에서 뒹구는 것과 같습니다. 토한 것에서 뒹구는 이유는 그가 심히 취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술에 많이 취하면 인사불성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토해 놓고 그것이 더러운지 모르고 거기에 뒹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대하여 교만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찌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할 수 있을까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교만합니다.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 들어가 거기에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신자는 죄와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니다. 신자만 그렇게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교만한지를 인식합니다. 그것을 인식할 때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술 취한 자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롬 13:13).
여호와에 대한 교만은 이스라엘에 대한 조롱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교만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도둑 가운데서 발견되기라도 한 것처럼 모압은 이스라엘을 말할 때마다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재앙 당하는 것을 보면서 조롱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교만한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97-598쪽).
사실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잘못은 있으나 모압을 해롭게 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압이 그들을 멸시하는 것은 큰 죄악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까닭없이 해롭게 하는 자들은 반드시 징벌을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말씀에 의거해서 신원하시는 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신원해 주십니다. 신원해 주시는 날을 바라보며 인내한다면 좋은 날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비둘기 같이 할지어다
28 모압 주민들아 너희는 성읍을 떠나 바위 사이에 살지어다 깊은 골짜기 어귀에 깃들이는 비둘기 같이 할지어다
하나님께서 모압의 모든 성읍을 멸하실 것이므로 모압의 주민들은 성읍을 떠나서 바위 사이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야생에 사는 비둘기처럼 정처없이 다닐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우리가 일반 은총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빼앗기게 됩니다. 모압이 빼앗기는 일반 은총은 사회와 관련된 은총입니다. 즉, 국가의 안전 보장, 사회 제도, 치안, 의료제도 같은 일반 은총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모여서 살면서 얻는 혜택을 다 빼앗기고 그저 무리 지어서 생활하는 비둘기처럼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98쪽).
"바위 사이"나 "깊은 골짜기"에 거한다 함은, 본토에서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사회적 안전 보장 없이 숨어서 살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벌써 본장 11절에 말한 것같이, 모압은 지리적으로 어느 나라보다도 안전한 나라였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안전 보장은 지리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안전한 조건들 밑에서 사는 자들도 죄악이 관영하면 필경 한지(寒地)에 떨어질 날이 온다. 그러므로 생활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자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계속하지 말고, 위기에 처한 자처럼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사는 것이 상책이다.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내가 안전한 조건들 아래서 산다는 것을 믿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지금 누리는 안전도 하나님께서 주셔서 누리는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29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3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의 노여워함의 허탄함을 아노니 그가 자랑하여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도다
29절에서는 다시 모압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그 교만이 심하다고 합니다. 모압은 모든 면에서 교만했습니다. 자고했고 오만했고 자랑했고 마음이 거만했습니다(29절).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화를 잘 낸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문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노는 허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교만하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랑하는 것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교만하여 외람되이 행하는 자는 자기의 분정(分定)에 합당한 걸음을 걷지 않는 자니 진정한 성공을 할 수가 없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랴"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98-599쪽).
모압을 위하여 울며
31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무리가 길헤레스 사람을 위하여 신음하리로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모압을 위하여 운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99쪽).
본절부터 34절까지는 모압이 겪는 참상(慘狀)에 대한 애곡(哀哭)을 진술한다. 누구보다도 선지자 자신이 모압의 멸망을 내다보고 울었다. 그 민족이 죄 때문에 멸망을 당할 것이지만, 선지자는 그것을 통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성도는 남이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심정을 소유한다. 잠 24:17-18에 말하기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라고 하였다.
"길헤레스"는 모압의 주요한 요새지이다(사 16:78; 왕하 3:25). 현대의 케레크(Kerek)라는 곳이 그 땅이라고 한다. 모압이 의지하던 이런 요새지가 무너짐에 따라, 그 나라가 말할 수 없이 비참하여질 것은 두 말할 것 없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모압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원수의 멸망은 그것을 보는 이에게 통쾌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렇게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죄로 인해서 멸망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나도 똑같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눅 13:4-5). 신자는 원수가 어려울 때 돕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원수가 조소할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가 나의 어려움 당하는 것을 보고 조소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나의 어려움을 속히 지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를 조소한다면 그것도 신자에게는 유익입니다. 원수의 조소(嘲笑)를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어려움을 속히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마의 포도나무여
32 십마의 포도나무여 너의 가지가 바다를 넘어 야셀 바다까지 뻗었더니 너의 여름 과일과 포도 수확을 탈취하는 자가 나타났으니 내가 너를 위하여 울기를 야셀이 우는 것보다 더하리로다
십마는 이사야 16장 8절에도 나오는 지명입니다. 여기는 포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라고 나옵니다. 거기 포도가 얼마나 유명한지 "너의 가지가 바다를 넘어 야셀 바다까지 뻗었"다고 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라고 묘사합니다. 그만큼 포도가 잘 되었던 곳입니다. 그곳에는 지금도 포도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포도가 잘 되는 땅으로 지금 사람들도 그것을 알아보고 포도를 재배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포도 수확을 탈취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자랑하던 포도원이 파괴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에 의하면 "야셀 바다"는 작은 못(池)을 가리킨 듯 하나 확실하지 않다고 주석합니다. 아마 옛날에는 큰 호수 같은 것이 그 지방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합니다. 야셀 사람들은 포도원이 파괴되어 울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내가 너를 위하여 울기를 야셀이 우는 것보다 더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포도원 같은 물질적인 손해로 인해서만 슬퍼합니다. 보이는 것이 빼앗겼다는 것에 대해서만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다릅니다. 그는 영원을 보면서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모압이라는 나라가 없어질 것도 그 슬픔에 포함됩니다. 더 나아가 영원히 심판 받을 것을 보면서도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런 슬픔은 구령(救靈)의 열정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 없이 망하는 사람의 영원이 얼마나 비참할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비통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
33 기쁨과 환희가 옥토와 모압 땅에서 빼앗겼도다 내가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 외치며 밟는 자가 없을 것이라 그 외침은 즐거운 외침이 되지 못하리로다
모압 땅은 포도의 산지로 옥토였습니다. 거기에는 기쁨과 환희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에는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과 환희, 즐거운 외침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600쪽).
모압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할 줄은 모르고, 그 땅의 산물인 포도의 수확을 인하여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언제든지 이 세상(물질과 기타 땅에 속한 것들)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등한시(等閑視)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필경 그들이 의지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빼앗는 날이 온다(참조. 사 3:1-2).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즐거워한다. 시 4:7에 말하기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하였고, 시 16:2에는 말하기를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하였다.
신자도 물질을 보면서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물질 자체를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풍성할 때에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물질을 즐거워하는 것과 신자가 물질을 즐거워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불신자는 "물질"을 즐거워하는 것이 맞지만 신자는 물질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절대 물질로 자랑을 삼지 않습니다. 신자의 유일한 자랑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며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34 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와 소알에서 호로나임을 지나 에글랏 셀리시야에 이르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소리를 내어 부르짖음은 니므림의 물도 황폐하였음이로다
이 구절에는 지명이 많이 등장합니다. 지명에 대한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은 다음과 같습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600쪽).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2마일쯤 서로 떨어져 있다. 이 도시들의 유적(遺蹟)들은 헤스반(Hesban)이라는 이름과 엘알(EL AL)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도시들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특별히 후자(엘르알레)는 언덕 위 꼭대기에 있었던 것이 알려진다. "야하스"는 "헤스본"의 서남쪽에 떨어져 있다. "소알"과 "호로나임"은 모압의 남쪽에 있다. "에글랏 셀리시야"는 모압 남쪽에 있는 도시였을 것이다. "니므림"도 역시 남쪽에 있다(참조. 사 15:6). "니므림의 물도 황폐하였음이로다"라고 한 것은, 옛날에는 전쟁 때에 적군이 강이나 기타 수원지(水源池)를 흙으로 묻어 버리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를
35 여호와의 말씀이라 모압 산당에서 제사하며 그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를 내가 끊어버리리라
모압이 교만했던 이유가 35절에 등장합니다. 모압은 자기들이 요새에 산다는 것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자기들의 신 그모스를 의지했습니다. 그 지역에 여러 번 전쟁이 있었지만 모압은 그 전쟁을 계속 피해갔습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자기들의 신에게서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신이 얼마나 헛되고 무력한 것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601쪽).
모압 민족은 전란(戰亂) 때에도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안할 때에 가졌던 그릇된 생각이었다. 그들이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역경에서는, 그 섬기던 우상들이 무력한 것임을 절실히 발견하였다(사 16:12). 그러므로 이제 와서 그들은 이 이상 더 산당 우상들에게 제사를 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힘쓰고 애쓰는 것이 나중에 헛 일임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허탈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허탄한 일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나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안전한 피난처요 바위이십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믿는 것은 헛된 것이지만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이요 가장 놀라운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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