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13장 20절 - 14장 22절 | 고통 중에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는 욥

2023. 11. 18. 07:11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13:20-14:22

    찬송가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욥의 간구

    욥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13:20-21)" 욥이 기도하는 것은 주의 손을 자기에게 대지 말아달라는 것과 주의 위엄으로 자기를 두렵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손을 대시면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그대로 사람에게 드러내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연약성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대지도 않으시고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지 않으시면 주께 나아가겠다고 합니다.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않겠다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 만이 자기가 당한 일에 대해서 답을 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죄 문제를 가지고 나아감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13:22-25)" 욥은 간절히 알기를 원합니다. 욥은 솔직하게 이 재난의 원인이 자기 죄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자기가 알지 못하는 큰 죄가 있다면 그것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자기 양심상 그런 죄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려주시기 않으시기 때문에 욥은 답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은총을 내리지 않으시니 욥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원수로 여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기는 날리는 낙엽이요 마른 검불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자기를 계속 놀라게 하시고 뒤쫓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욥은 자기가 깨닫지 못하는 죄악이 얼마나 많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는가 생각합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13:26-28)"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자기를 대적하심이 자기가 젊었을 때 지은 죄 때문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기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길과 발자취를 살피셔서 자기를 죄인 취급하신다고 합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그가 죄인으로 그 발이 차꼬에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그렇게 자기 수명이 점점 단축되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죄인으로서 소멸되어가는 느낌인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답답함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대적하고 계시니 자기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지난 날을 자꾸 돌아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죄인으로 취급될 죄를 혹시 젊었을 때 짓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젊었을 때 지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다가오자 다시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죄성과 연약성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14:1-3)" 욥은 자기의 젊은 날의 죄를 생각하면서 자기 인생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를 생각합니다. 욥은 사람의 연약함을 표현합니다. 사람은 여인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불완전하고 연약합니다. 생애가 짧습니다. 짧은 생애를 걱정으로 보냅니다. 그것이 마치 꽃이 쉽게 시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날은 그림자가 금방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연약하고 빨리 지나가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고 자기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세밀하게 재판하신다고 합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그의 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14:4-5)"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날과 달 수를 정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은 사람의 더러운 것을 제어하시기 위함입니다. 욥은 자기가 깨끗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그렇게 다루시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14:6)" 욥은 하나님께 자기를 놓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자기는 더러우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한을 정하셨으니 이제 놓아달라는 것입니다. 품꾼이 정한 하루 동안 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데 주인이 그 품꾼을 계속 따라다니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놓아달라고 간구합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하나님께서 매분, 매초마다 그를 가만히 두지 않으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침 삼킬 동안도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욥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고 재판하시고 죄를 물으시는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자기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그만 놓아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성경 | 욥기 13장 20절 - 14정 22절 | 고통 중에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는 욥

    사람이 죽으면 눈 앞에서 사라지나 욥은 부활을 소망함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에서 늙고 줄기가 에서 죽을지라도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14:7-10)" 욥은 나무는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는 죽은 것 같이 보여도 나중에 보면 다시 움이 돋고 가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나무는 마치 새로 심은 것처럼 생명력이 넘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가 못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14:11-13)" 나무가 다시 소생하지만 사람은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잠을 깨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말라 없어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없어져서 볼 수가 없습니다. 욥은 자기가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하기를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라고 합니다. 스올은 죽음을 뜻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이 스올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시리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숨기셨으나 기한이 차면 자기를 기억하시리라는 믿음입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14:14)" 그러면서 앞에서 한 말을 반복합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이 말은 이제 희망 섞인 말입니다. 여기서 "어찌"는 원문에는 없습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다시 살리이까, 이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살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으면 다시 살리이까, 이에 대한 답은 나는 기다리겠나이다,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모든 날을 참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는 그 날, 내가 풀려날 것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죽으면 감춰져서 사람들에게 다 잊힐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잊지 않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14:15)"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면 자기는 죽음에서 깨어 일어날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죽음에서 깨어 일어나야 대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몸의 구속을 가리킵니다. 즉, 그가 죽어서 물이 말라 없어지는 것처럼 몸이 썩어 소멸되겠지만 기한이 차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주께서 지으신 부활의 몸을 입겠다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표현하고있지만 욥의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사람의 희망이 끊어지는 것은 죄 때문임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14:16-20)" 욥이 당면한 현실은 희망이 끊어지는 것 같은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떠나게 하시고 쫓아내시는 것 같은 현실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걸음을 세시고 죄를 감찰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허물과 죄악을 계속 간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어디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죄를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서 다 물으십니다.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희망을 갖고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욥이 부활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소망을 피력했지만 그 부활의 소망은 자기의 의로는 꿈꿀 수 없는 소망인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산이 없어지고 바위도 자리를 옮기고 물에 돌이 닳는 것처럼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욥처럼 아무리 의롭다고 하더라도 그도 사람이므로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괴롭게 함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14:21-22)" 그렇게 지나간 사람은 나중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아들이 존귀하게 될 지 비천하게 될 지 알지 못합니다. 사실 알아도 그에게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죄로 인해서 살이 아프고 그 영혼이 애곡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처지입니다. 죄인에게서 아무런 의가 나올 수 없습니다. 더러운 데에서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은 사람의 죄인됨이 이렇게 비참하다는 것을 말하는데 자기가 당하는 고통으로 더 선명하게 깨닫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부활을 소망하지만 현재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현실은 심히 괴롭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이 괴로움이 속히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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