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15장 1-16절 | 두 번째 대화를 시작하는 엘리바스, 일반론으로 특수한 상황에 있는 욥을 정죄함

2023. 11. 19. 11:4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15:1-16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두 번째 대화를 시작하는 엘리바스

    욥의 탄식 이후에 엘리바스의 말이 이어집니다. 이제 15장부터 엘리바스로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대화가 오고갑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1-2절)" 엘리바스는 욥이 대답한 것이 헛된 지식이라고 합니다. 즉 욥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동풍은 농작물에 해로운 바람입니다. 동풍은 매우 건조한 바람이라서 동풍이 불면 농작물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욥의 마음에 동풍 같이 헛되고 해로운 바람이 가득찼다는 말입니다. 욥을 좀 더 과격하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3절)" 욥의 말이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고 무익한 말이라고 합니다. 지혜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욥은 지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4-5절)"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묵도는 기도를 뜻합니다. 그치게 한다는 것은 점점 소멸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기도가 점점 없어집니다. 만약 일상에서 기도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니 죄가 그대로 말로 나오게 됩니다. 이 말은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계속 견지하면서 하나님께 자기 처지를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가 더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말로 자기를 정죄함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6절)" 엘리바스는 욥이 말로 정죄하는데 그 정죄가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간다고 합니다. 믿는 자들은 바름을 이야기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도리어 나를 정죄하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냐면 내가 바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데 그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됨됨이가 바름에서 먼데도 바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인데 자기도 자기에게 속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남을 정죄하는 말을 하지만 그 정죄는 사실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외식하는 사람에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입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쓸모 없는 의원이라고 했습니다(13:4).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낯을 따르는 자라고 했습니다(13:8). 하나님을 변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욥의 말은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욥은 재판자로서 친구들을 정죄한 것이 아니고 피해자로서 그가 당한 피해에 대해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재판자처럼 구는 사람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바스의 이 말은 욥에게 해당하지 않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오히려 엘리바스와 친구들에게 적용이 되는 말입니다. 이 말대로 엘리바스는 스스로를 정죄한 자가 되었고 그의 말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되었습니다.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7-8절)"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는 말은 네가 아담과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직접 들었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았습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은 하나님을 향한 참 지식(골 3:10)과 의와 거룩함(엡 4:24)이 있었습니다. 아담은 최초의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요 동산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타락한 후에 아담의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죄로 오염되었지만 그래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은 자였다는 것과 세상에서 홀로 지혜있는 자였다는 사실은 변함 없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아담을 들어서 욥의 말이 지나치다고 반론하고 있습니다.

     

    매일성경 | 욥기 15장 1-16절 | 두 번째 대화를 시작하는 엘리바스, 일반론으로 특수한 상황에 있는 욥을 정죄함

    연장자가 지혜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9-10절)" 엘리바스는 욥이 더 깊은 씨름을 하고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의 권위에 호소합니다. 나이가 많은 자가 더 많이 알고 더 지혜롭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나이가 많으면 그만큼 지혜와 경험이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원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특별한 일과 씨름하는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경험으로 특수한 일에까지 조언을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위로자가 곧잘 빠지는 함정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네 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11-13절)" 엘리바스는 자기들이 욥에게 한 말을 하나님의 위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욥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도 마음이 불만스러워하고 눈에 적대감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마음으로 분노를 터뜨리면서 말을 계속한다고 정죄합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욥을 오히려 정죄하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바스와 친구들의 말이 정말 하나님의 위로가 되었다면 욥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쁨으로 그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반드시 효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위로가 욥에게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위로는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위로는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위로는 받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야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에는 위로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실수가 담겨 있습니다. 위로자가 위로할 때에 중심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위로자가 아니고 위로를 받는 사람입니다. 위로를 할만큼 다 했다고 화를 내는 위로자가 있는데 그런 사람은 참된 위로자가 아닙니다. 또한 위로자로사 사람은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십니다. 목사가 말씀을 전할 때 성도가 크게 위로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목사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목사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의 마음에 적용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위로자도 자기가 좋은 위로자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엘리바스는 지금 그런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전적타락 교리는 맞으나 그것으로 욥을 정죄할 수는 없음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14-16절)" 엘리바스는 욥이 위로를 받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그가 스스로 의롭다고 했다면서 정죄합니다. 15절에서 거룩한 자들은 천사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워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청명한 하늘이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부정합니다. 그러하건만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고 가증하고 부패하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이 말은 악한 정도가 심각하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곤고함을 탄식합니다(롬 7:21, 24).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욥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욥도 자기를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9:20; 14:4). 욥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당한 재앙이 자기의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욥은 그런 죄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도 일반적인 것으로 특수한 것을 정죄하는 말입니다. 틀린 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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