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38장 39절 - 39장 30절 | 짐승들에게도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

2023. 12. 17. 11:0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욥기 38:39-39:30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사자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동물들을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들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동물은 사자입니다.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38:39-40)" 하나님께서는 사자도 먹이십니다. 특별히 식욕이 왕성한 젊은 사자도 먹이십니다. 사자가 사냥하는 것을 보면 잔혹해 보입니다. 무리 중에서 약한 것을 사냥하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의 현장이라서 사람들은 불편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먹이시는 방법입니다. 도덕적으로 옳다 그러다 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자도 엄연히 생태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잔혹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고 가장 선한 것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자가 사냥하는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까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까마귀는 시체를 먹습니다. 이것도 잔혹해 보입니다. 하지만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어서 우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자도 그렇고 까마귀도 그렇고 그것들이 먹고 사는 것에도 하나님의 위엄과 신비가 서려 있습니다. 사람이 섣불리 판단하지 못할 의미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은 잔혹해 보입니다. 하지만 고난에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체계가 있고 하나님의 위엄과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사나운 짐승과 시체를 먹는 날짐승을 보면서 이런 것들에 관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산 염소에 관하여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39:1-4)" 산 염소는 바위 산의 절벽을 타고 다니는 염소입니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곳에 살기 때문에 이것들이 언제 새끼를 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암사슴은 산 염소의 암컷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산 염소들에게까지 관심을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것들을 기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산 염소들에게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무서워하지 않는 습성을 주셨습니다. 그 새끼들도 금방 강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들 또한 엄연한 자연의 구성원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위험 가운데 있는 산 염소

어떻게 보면 산 염소는 일생동안 위험과 고난을 마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왜 자기들은 이렇게 위험하게 살 수밖에 없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어진 본능에 순응하면서 살아갑니다. 위험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산 염소들은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포식자들이 절벽과 높은 곳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위험이 오히려 가장 안전한 보고 장치가 됩니다. 어쩌면 고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엘리후의 말처럼 고난은 사람의 귀를 열어주기 때문입니다(36:10). 귀를 열어 교훈을 듣는 사람은 죄악에서 돌이킵니다. 그 결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옮겨집니다. 

 

매일성경 | 욥기 38장 39절 - 39장 30절 | 짐승들에게도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

들나귀에 관하여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39:5-8)" 하나님께서는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들나귀는 잘 길들여질 것처럼 생겼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사람의 접근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둬놓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 갇혀 있지 못하는 습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습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들나귀는 안락한 것을 거절하고 들을 집으로 삼습니다. 소금 땅을 처소로 삼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고생인 것 같지만 들나귀에게는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긴 들나귀도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도 있음을 인정해야

사람은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제한 두신 것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난은 사람에게 그것을 깨닫게 합니다.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합니다. 들나귀를 보면서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들소에 관하여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9-12절)" 들소는 크고 힘도 굉장히 셉니다. 그 힘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사람에게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하지만 들소는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같은 소라도 길들여지는 품종이 있고 안 되는 품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원래 모든 짐승들은 사람에게 복종했습니다. 이것이 깨어진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사람의 반역은 짐승의 반역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들소 같은 동물이 사람의 제어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반역적인 자기 자신을 살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들소를 보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께 반역적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들소를 자연계의 일원으로 인정하시고 허용하시듯이 반역한 자기에게도 긍휼을 베푸심을 깨닫습니다. 고난이 있건 없건 지금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들소를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고난이 있음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타조에 관하여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그것이 알을 에 버려두어 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13-18절)" 타조에게도 날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타조의 날개는 학의 날개와 같지 않습니다. 학은 날개로 우아하게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조는 아무리 날개를 쳐도 날 수 없습니다. 또한 타조는 알을 낳고 버려둡니다. 새끼를 돌보지 않습니다. 타조가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조에게 날 수 있는 능력도, 새끼를 돌보는 지혜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빨리 달리는 능력입니다. 

타조 새끼는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타조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으셨지만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타조의 본성을 이룹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에게 각각 본성을 주심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일을 이루십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타고난 본성이 다 다릅니다. 타조처럼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는 무자비한 본성을 가진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자식은 살면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타조처럼 자기에게 뭔가 강한 것이 있음을 또 깨닫고 인생을 잘 살아가기도 합니다. 동물이 다채로운 만큼 인생도 다채롭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기에 무엇이 좋다,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마에 관하여

"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39:19-25)" 하나님께서는 말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말은 군마입니다. 앞에서 타조는 달리는 것에 있어서 말과 그 탄자를 우습게 여긴다고 했습니다(39:18). 하지만 군마는 타조보다 사람에게 훨씬 유용합니다. 군마는 이중적인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게 쉽게 길들여진다는 기질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기질입니다. 말은 힘이 세지만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한 번 길들여지면 충성을 다합니다. 전쟁에 나가서도 명령에 그대로 복종합니다. 적에게 돌진하라고 하는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 명령을 그대로 수행합니다. 

사람에게 유용하다고 꼭 좋은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쓸모 없는 짐승들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크게 유용한 짐승인 군마를 말씀하십니다. 군마는 사람에게 유용한 짐승이지만 전쟁에 쓰이는 짐승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사람에게 유용하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을 길들여서 기병대를 만들었습니다. 기병대는 역사 내내 전쟁과 약탈에 쓰였습니다. 앞에서 쓸모 없는 짐승들을 생각하면서 고난에 대해서 섣불리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군마를 생각할 때 사람에게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돈이나 권력이 꼭 사람에게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유용할 기질을 주신 말이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빼앗고 약탈하는데 쓰였기 때문입니다. 

매와 독수리에 관하여

"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26-30절)" 하나님께서는 매와 독수리에 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매가 남쪽으로 향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나라의 참매는 텃새지만 매의 종류 중에서 철새도 많습니다. 근동지방의 매는 철새의 성격을 가진다고 합니다. 매는 때를 알아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독수리는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삽니다. 다른 짐승이나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곳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또한 독수리는 멀리 봅니다. 멀리 보기 때문에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습니다. 

재림 때와 독수리

예수님께서는 재림을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마 24:28; 눅 17:37).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디로 오실지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때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내가 오는 것을 어디에 있든지 볼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수리에게 멀리 보는 눈을 주셔서 어디에 시체가 있는지 멀리서도 볼 수 있게 하신 것처럼 내가 올 때에는 너희도 그렇게 밝히 볼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민감하게 함

매는 어떻게 남쪽으로 가는 때를 저렇게 정확하게 알까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답은 하나님께서 매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입니다. 시체가 있는 것을 독수리들은 어떻게 알고 저렇게 금방 모일까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멀리 보는 눈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짐승들에게 주변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능력을 민감하게 합니다. 그 결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위험을 감지하려고 귀를 엽니다.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그러면서 피난처를 찾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고난은 그 사람에게 복입니다. 참된 안식처, 영원한 안식처로 그를 인도해 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난의 원인을 다 죄에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크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