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19. 10:4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41:1-34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리워야단
베헤못에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리워야단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1-5절)" 리워야단은 바다 속에 사는 거대한 동물입니다. 신화적인 동물입니다. 이 짐승은 세상 나라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편 74편 14절에서는 이집트를 비유하고 이사야 27장 1절에서는 앗수르를 비유합니다.
바다의 최강자
하나님께서 여기서 리워야단을 말씀하시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리워야단은 바다의 최강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호시탐탐 땅을 노립니다. 땅에 사는 사람에게 바다는 위협입니다. 이 바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죽음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경계를 정하셔서 바다가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악의 범위를 제한하신 것입니다.
그 무엇의 제어도 받지 않는 짐승
이 바다의 수장과도 같은 짐승이 리워야단입니다. 리워야단은 강한 짐승입니다. 강하기 때문에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리워야단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못하면 그 어떤 생물도 그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즉 리워야단은 생명체 중에서는 그 무엇의 제어도 받지 않는 짐승입니다. 강한 것은 이 짐승처럼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약한 하나님 백성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약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리워야단으로 비유되는 애굽에게 고통을 당했습니다. 앗수르에게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강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약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누가 이겼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방법입니다.
힘을 힘으로 제어하지 않으심
하나님께서는 힘을 힘으로 제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힘을 가장 약한 것으로 제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11절)" 이 말씀이 핵심입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가져와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찬양했습니다. 로마서 11장입니다.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인간의 반역과 리워야단
리워야단은 하나님 백성을 삼키려는 바다의 세력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순종하지 않는 인간을 비유합니다. 왜냐하면 리워야단이 인간에게 순종하지 않는 원인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강력한 짐승이라도 인간에게 순종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그러졌습니다. 힘의 논리로 힘이 센 존재는 힘이 약한 존재 위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짐승이지만 인간보다 강하고 힘이 세기 때문에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 원인은 인간의 타락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였기 때문에 짐승도 인간에게 반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워야단을 길들일 수 없다는 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반역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역으로 불순종에 갇힘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사람이 리워야단처럼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라고 바울 사도는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곧 모든 사람이 불순종에 갇혀 있기 때문에 아무도 순종을 빌미로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욥은 자기 결백으로 하나님께 답변을 요구할 수 없음
사람이 리워야단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리워야단의 인간에 대한 반역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드러내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눈을 리워야단에게 향하게 하심으로 욥이 하나님께 자기가 결백한 것을 빌미로 대답을 요구한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31:35). 이것은 마치 리워야단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숙명
하나님께서 욥에게 리워야단을 보여주시면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숙명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리워야단에게 고난을 받습니다(시 74:14; 사 27:1). 리워야단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도 대적합니다. 그러면서 강합니다. 그 강한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합니다. 괴롭힙니다. 리워야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힐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백성은 리워야단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
이것이 욥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사탄이 의인을 대적하는 이유는 의인을 무너뜨려서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리워야단이 하나님 백성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는 세상 나라를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강한 짐승, 리워야단 같은 짐승은 하나님 백성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답
이것이 욥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답입니다. 의인인 나에게 왜 고통이 임합니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네가 의인이라서 고통을 당한다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이라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통 당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의인이셨습니다. 완벽한 의인으로서 당신님의 백성과 동일시 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백성이 이루어야 할 의를 완성시키셨습니다. 그 완성 안에 무엇이 있냐면 십자가의 무한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즉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갑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 안에 있는 고통입니다.
고통의 끝
이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장입니다.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해산의 고통은 지극한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지극한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이와 같은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생명의 부활을 낳은 고통입니다. 지극한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준 고통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것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한 답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담대하라. 왜냐, 내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라.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이미 이긴 고통입니다. 이미 완성된 고통입니다.
고통이 우리에게 이루는 것
이미 완성되었으면 왜 우리는 고통을 당해야 할까요? 고통이 우리에게 뭔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장 문맥을 보면 해산의 고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주체가 셋입니다. 첫째는 성령님이시고 둘째는 우리이고 셋째는 피조물입니다. 이들이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고통이 우리에게 이루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으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고통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고통을 받습니다. 승리를 이끄는 고통, 예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고통을 받습니다.
리워야단의 결국
반면 리워야단으로 대표되는 자들, 또는 리워야단의 세력들은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33-34절)" 리워야단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러나 이것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역사상 하나님 백성을 대적한 모든 나라는 다 망했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사망과 용으로 비유되는 사탄도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고통없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면 영원한 멸망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승리공식
고통이 없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리워야단을 보세요. 정말 좋은 것일까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승리가 아니고 영원한 패배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악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악을 다루시는 지혜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무한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악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고통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과 인내로써 우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결과를 아는 사람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승리공식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패배공식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가진 힘으로 의인을 핍박하여 패배합니다. 반면 하나님 백성은 약한 모양으로 박해를 당함으로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리워야단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에는 이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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