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42장 1-17절 | 욥기의 아름다운 결말과 우리에게 주는 교훈

2023. 12. 20. 16:00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42:1-17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욥의 회개로 욥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1-2절)" 욥은 하나님께서 못 하실 일이 없고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교만한 자를 낮추는 것입니다(40:10-13). 그 방법은 힘이 아닙니다. 힘으로 모든 교만한 자를 낮추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교만한 자에게 고난을 받음으로 낮추는 것입니다(41:10-11; 롬 11:30-36 참조).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시고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방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욥기 40장, 41장 해석 참조). 욥은 하나님의 그 계획 안에 자기 고통이 있는 줄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고통만 생각하여 무지한 말을 함

    언뜻 보면 욥의 수긍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욥은 어떤 말씀에서 자기 고통의 의미를 깨달은 것일까요? 바로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관한 말씀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과 악한 자들, 특히 힘센 베헤못과 리워야단처럼 짐승들과 같은 자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 말씀을 다 듣 고보니 자기 말이 얼마나 무지한 말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3절)" 욥은 자기 고통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경영하시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시야가 넓어진 욥은 자기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고 자기 죄를 시인합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6절)" 스스로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자기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인 것으로 말하였는데 그 말이 얼마나 무지한 말이었는지를 시인한 것입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를 낮은 자리에 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결백하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높였던 것을 스스로 한탄하고 스스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에 앞서서 욥은 하나님께 배우는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라는 말씀은 이제부터는 배우는 태도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뭔가를 아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한 자인지 아는 사람으로 그렇기 때문에 항상 배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후에 전보다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을 체험하였지만 몸소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하나님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욥이 회개한 것

    욥의 태도로 욥이 무엇을 회개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이로 볼 때 욥은 하나님 앞에서 무지한 말로 스스로를 높인 것을 회개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을 회개한 것입니다(31:35). 이것은 불신앙과는 다른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불신앙의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1:1). 그는 야고보서에서 인내의 표본으로 등장합니다(약 5:11). 욥이 원망한 것 같은 기록들이 있으나 그것은 원망이 아니고 탄식과 하소연입니다(7:11; 23:2).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자기 고통의 원인을 여쭈면서 아뢰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인내요 믿음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인내하는 중이라도

    신자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중에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 죄는 바로 무지한 말로 스스로를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죄입니다. 바로 욥이 지은 바로 그 죄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롭다고 하는 것과 같은 죄입니다(32:2). 욥은 이런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배우려는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높아질 때에나 낮아질 때에나 항상 하나님 앞에서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중요시해서 자기 문제에 너무 매몰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훨씬 큰 것을 주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로 형제를 괴롭게 한 죄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7-9절)" 하나님께서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에 그를 대표로 하여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와 두 친구가 말한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죄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방법 중에서 일부를 가져와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말했습니다.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법칙으로 욥을 정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법칙을 만드셨지만 그 법칙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욥의 고난은 그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것으로 욥을 악인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이것은 진리로 형제를 괴롭힌 것입니다. 아주 큰 죄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죄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너무 쉽게 설명하려는 설교자들

    진리라는 이름으로 이 시대에 만연해 있는 죄악이 바로 이런 죄악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너무 쉽게 설명하려는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설교를 듣고 큰 환난 안에 있었던 성도들의 믿음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피해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제가 죄인이 아니냐, 네가 악인이 아니냐, 라는 말을 들은 피해자인 욥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영적 권위

    고난 당하는 자와 위로하는 자 중에서 누구에게 영적 권위가 있을까요? 보통은 위로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는 자에게 영적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고난 당하는 자는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 만으로 이미 마음이 낮아져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져 있습니다. 영적인 가난에 고달파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평안한 자가 가서 위로를 전하면 평안한 자가 영적 권위를 가집니다.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법칙에 의해서 평안한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비교 우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자가 권위자임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정반대라고 하십니다. 평안한 자가 영적 권위자가 아니고 고통 받는 자가 영적 권위자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해자를 그렇게 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 말한 세 친구를 위해서 영적 권위를 가지고 구하는 사람은 바로 욥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들어서 세 사람의 권위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권위자로 높아지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되 지옥 밑바닥까지 낮추셨습니다. 그렇게 낮아진 예수님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됩니다(빌 2:5-11).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주변에 어려움을 당해서 낮아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복된 자요 그가 영적인 권위자입니다. 비슷한 말씀이 또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양들은 주린 자들과 목마른 자들과 나그네된 자들과 헐벗은 자들과 병든 자들과 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즉 상을 주는 주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권위자인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세 친구들을 위한 제사장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으로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이 누구냐 바로 욥입니다(8절).  욥이 중재자요 권위자로서 세 친구와 하나님 사이에서 번제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번제를 드릴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일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법이 가장 발달한 제국이었던 로마에 의해서 죄인으로 정죄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반역자라는 정죄를 받으시고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형에 처해지셨습니다. 그 사형수이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 대제사장으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욥의 고난의 의미는 여기에서도 밝히 드러납니다. 욥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 안에 있는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끝나는 지점, 중보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10절)"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키신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바로 중보의 순간입니다. 이것 또한 놀랍습니다. 욥의 고난은 이것을 위한 고난입니다. 바로 자기를 죄인이라고 정죄한 자들, 하나님을 노하시게 한 자들을 위해 중보하라고 주신 고난입니다. 중보에서 고난이 끝납니다. 영광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처럼 의인의 고난은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특별히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자기를 정죄한 사람, 자기를 말로 치고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면서 고난이 끝납니다. 소유가 갑절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이 당한 것에 대해서 배나 받으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먼저 욥에게 있었던 모든 것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돌려주셨습니다. 거기에 이제 하나님께서 고난에 상응하는 중보에 상응하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로 갑절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시대에 예수님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현세에 있어서 집이나 형제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버린 자는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막 10:30).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이 말씀은 포로 귀환과 같은 단어로 쓰였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욥이 리워야단의 세력, 사망 세력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멀게 느껴졌습니다. 삶에 곤란과 곤고가 가득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 있었던 때를 가리켜서 무덤에 있었던 때라고 표현합니다(겔 37:13). 이 때는 하나님과 멀어진 때이고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진 때입니다. 이것이 욥이 당한 곤경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을 포로상태에서 돌이키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관계 회복의 열쇠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11절)"  욥기의 아름다운 결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자(10절) 모든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께서 멀리하시면 사람과의 관계도 단절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을 주시면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관계의 열쇠는 우리가 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 근본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자 이전에 욥을 알던 사람들이 와서 욥의 고난을 슬퍼하고 위로합니다. 고난을 받을 때 신자는 욥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인내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고 그 다음이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는 습관은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작게 시작해서 창대하게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11-15절)" 하나님께서는 끝에 더욱 욥을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빌닷의 말처럼 하셨습니다(8:7). 빌닷의 말은 틀린 말이었지만 그 안에도 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보다 끝을 창대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큰 것은 작게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시작은 결코 작지 않았으나 다 잃어버린 욥의 시작은 작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이전보다 훨씬 크게 하셨습니다. 정확하게 배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매일성경 | 욥기 42장 1-17절 | 욥기의 아름다운 결말과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욥의 딸들

    특별히 욥의 딸들이 언급됩니다. 여미마는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순결을 뜻합니다. 긋시아는 계피라는 뜻입니다. 향기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게렌합북은 눈화장을 하는 검은 염료를 담는 뿔을 의미합니다.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온 땅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참 시적인 표현입니다. 욥이 받은 복은 욥에게서 아름다운 딸들이 나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욥에서 생명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욥에게서 온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들이 났다, 즉 십자가를 통과한 예수 그리스도로 가장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어린 양의 신부가 나온 것입니다. 

    욥의 아름다운 결말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16-17절)" 욥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 부분을 70인 역은 욥이 그 후 170년을 더 살고 240세에 죽었다고 번역합니다. 이렇게 되면 욥이 고난을 당한 나이는 40세가 됩니다. 이것은 70인 역의 번역으로 참고할만한 것입니다. 꼭 70인 역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고난 이후의 삶이 고난 이전의 삶보다 훨씬 길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이라고 볼 때 욥은 200년 남짓 살았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140년이 고난 이후의 삶이면 고난 이전보다 적어도 두 배 정도는 더 산 것입니다. 로마서는 8장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난은 작고 영광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욥은 고난 중에서 자기 상황이 언제 끝날 것인가 하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고난은 이렇게 시간을 더디게 가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한 사람은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욥기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고난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을 때는 고난이 영원한 것 같지만 지나면 영광이 영원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으로 이미 들어갔고 앞으로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 예약은 그 누구도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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