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40장 1-24절 |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만물을 경영하심, 베헤못에 관하여

2023. 12. 18. 15:31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40:1-24

    찬송가 66장 다 감사드리세


    하나님을 꾸중하는 행동

    자연으로 욥을 교훈하신 하나님께서는 40장에서 욥에게 대답을 요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1-2절)" 하나님께서는 지금 욥에게 문답교육을 하고 계십니다. 들었으면 대답을 해보라고 하십니다. 개역개정은 "트집 잡는 자"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 말(יִסּוֹר)은 "꾸중하다, 잘못을 찾아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새번역에서는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라고 번역했습니다.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서 마치 법정에서 서류를 들이밀 듯이 하나님께 대답을 구했습니다(31:35).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꾸중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다투고(רִיב) 하나님을 탓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용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신앙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에게 불신앙과 반역의 마음이 있었다면 야고보서는 욥을 인내의 모본으로 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욥의 행동은 하나님에 대해서 지나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꾸중하신 것은 바로 그 부분입니다. 사람은 항상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깊이와 너비가 한량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용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꾸 말을 지나치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깊이 경외해야 합니다.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3-5절)" 욥의 심정이 이 말에 잘 나타납니다.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은 자기가 말한 것들을 주워 담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손으로 입을 가린다는 것은 자기가 한 말들을 스스로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분명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앎은 귀로 듣는 수준의 앎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욥의 눈을 드셔서 기상현상과 동물들을 보게 하신 후에 욥은 영적인 눈이 열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위엄과 깊은 지혜를 보았습니다. 보고 난 후에 욥은 스스로가 비천하게 보였습니다. 또한 그동안 자기가 한 말들이 한없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욥은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그동안 한 말이 무지한 말임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태도입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6-7절)" 하나님께서는 다시 큰 위엄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면서 그냥 듣고만 있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사람이 말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께 대답을 합니다. 욥이 말한 것을 다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대답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뢸 때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대답해주실 때 나의 대답을 요구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격적 교제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현하여 말씀을 듣고 대화한다는 것은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8절)" 여기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는 말에서 공의는 체데크가 아니고 미슈파트(מִשְׁפָט)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재판하시어 판결하신 것을 깨뜨리려고 하느냐, 없애려고 하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욥의 결백입니다.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가 그런 뜻입니다. "네 의"에서 의는 체데크(צָדַק)입니다. 이 말은 욥 네가 결백하다고 하니 그렇다면 나에게 잘못이 있다(רָשַׁע)는 말이냐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선악을 판단하시고 계십니다. 욥이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셨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만 보면 되는 사람과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욥은 하나님께 이러한 불신앙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는 모르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세상에는 이렇게 모르겠는 일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 모르겠는 일에는 악인들이 잘 되고 선인들이 고통 받는 경우들이 포함됩니다. 욥은 이런 것들로 세 친구들과 변론했습니다. 변론 후에는 하나님께 대답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태도는 마치 의인이 자기가 의롭다는 것으로 악인을 재판 자리에 앉히려는 태도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사람이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굉장히 불경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기의 결백만 주장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자기가 결백하다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직접 대답을 들을 권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복잡한 일의 선악을 통치하시면서 모든 것으로 의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욥은 사람으로서 유한한 자기 자신만 바라보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다 통할하고 계시기 때문에 훨씬 큰 것을 바라보시고 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결백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굉장히 좁은 소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견이 얼마나 좁은 것인지를 그 결론을 들어서 욥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은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큰 일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얼마나 큰 일을 경영하시는가를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9-14절)" 하나님의 능력은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는 능력입니다.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셔서 낮아지게 하시고 악인들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으시는 능력입니다. 그들을 진토에 묻으시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두시는 능력입니다. 이것에 하나님의 영광과 영화가 있습니다.

     

    매일성경 | 욥기 40장 1-24절 |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만물을 경영하심, 베헤못에 관하여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와 알곡이 뿌리를 함께 얽고 있기 때문에 단번에 선과 악을 갈라내어 심판을 하게 되면 알곡이 다치게 됩니다(마 13:29).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탄에 대한 심판이 유보되어 있는 이유도 그 안에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심판을 이루시기 전에 먼저 영광의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십자가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요 12:23-24).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이 말씀처럼 영광과 영화를 입는 것은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신비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온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유지되고 성립될 수 있는 기초요 근거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온 우주의 역사도 없었습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찬란한 역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선포하는 놀라운 일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신 것은 네가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리라 하신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 당신님의 의로써 당당히 하나님께 얻을 것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죽음이 예수님을 가둬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의를 인정 받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의를 적용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방법입니다. 욥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헤못에 대하여

    "이제 소 같이 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그 뼈는 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15-24절)" 십자가의 신비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베헤못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베헤못은 짐승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베헤마와 연관됩니다. 그 뜻은 큰 짐승입니다. 개역한글은 이것을 하마라고 번역했습니다. 초식동물로서 가장 강력한 동물을 상상할 때 하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묘사된 베헤못은 하마보다 크고 강력한 동물입니다. 아마도 지금은 멸종한 어떤 동물을 뜻할 것입니다. 

    베헤못의 강함

    문맥상 여기에서 베헤못이 나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힘이 세고 강력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냐 이렇게 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에서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광과 영화를 입"는 것이 힘이 세어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강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사람은 강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생각입니다. 자기가 무한정 강하다면 순식간에 악을 처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무한한 지혜로 다스리시는데 특별히 악한 것이라도 허용하심으로 다스리십니다.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심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날뛰도록 두셨는데 어디까지 두셨냐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한고통을 당하시기까지 두셨습니다. 그렇게 두실 수 있는 것이 영광이요 영화로움입니다. 그 고통을 끝까지 감내하신 것이 영광이요 영화로움인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고통에 대한 답입니다. 강한 것이 좋은 것이고 강한 것만이 선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하여 아니라 십자가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답하시는 것입니다. 베헤못과 41장에 나오는 리워야단에 대한 말씀은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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