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마태복음 5장 21-32절 | 부하직원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안 되는 이유

2023. 1. 28. 07:04성서유니온 매일성경/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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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마태복음 5:21-32

    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부하직원이 있다면

    부하직원이 있다면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겠죠? 그런 분들은 오늘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는 자로서 높은 위치에 올라갈수록 더욱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더 나은 의란?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더 나은 의가 무엇이냐를 가르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살인하지 않는 수준의 의입니다. "살인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의롭다." 이것이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참 뜻을 다시 생각하게 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말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하거나 "라가"라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은 지옥 불에 들어갈 일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라가"는 우리 말로 하자면 "골 빈 놈"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입니다. 그다음으로 "미련한 놈"이라 하여 헬라어로는 모로스(μωρός)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모로스는 영어로도 있는 단어인데 멍청이, 덜 떨어진 녀석, 이런 뜻입니다. 이 말들은 사람을 멸시하는 말들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말을 내뱉었다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그 사람을 멸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문제 삼으십니다. 

    외면보다 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의 수준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입니다. 의는 외면보다 내면에서 정해집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가르치는 의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의지와 감정으로, 모든 면에서 항상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의"입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함

    이런 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가 23절 이하에 나옵니다. 자기가 부지중에 형제에게 어떤 원망들을 만한 일을 했습니다. 사람인지라 그럴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 일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그럴 때 지체하지 않고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빌고 화목합니다.

    왜 이렇게 까지 행합니까? 예물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자기를 본 것입니다. 자기 내면과 행위를 본 것입니다. 자기 안에 지옥불에 해당하는 일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았으므로 바로 가서 형제를 억울하게 한 것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의로워지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고발할 정도로 뭔가 억울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일입니다.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는 말씀은 모든 것에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염두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아야 합니다(25-26절). 그러니 그가 입을 열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기 전에 급히, 신속히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배상을 합니다.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수록 지옥불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혀 모든 것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 손에 떨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의 무서움

    내가 멸시할 수 있는 약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상 그는 하나님 앞에 고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약하니까 더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법으로 고발할 수조차 없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내가 그를 무시하여 억울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은 그 속을 다 아십니다. 거기에 하나님 앞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상소까지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섬기는 자는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을 압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항상 사람을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강하냐, 약하냐, 유력한 사람이냐,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냐, 내 윗사람이냐, 아랫사람이냐, 혹은 걸릴까 안 걸릴까를 생각하면서 사람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음욕을 품는 것으로 지옥불을 느끼는 사람

    간음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른 눈을 빼고 오른 손을 찍어 버리는 이유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에 지옥불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기 때문에 음욕을 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장애를 입는 것이 낫다는 심정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빼어 버리고 찍어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의 엄중함을 아는 의로운 자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이 더 마음에 든다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은 간음하는 것이요 또한 간음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큰 죄입니다. 이혼증서를 써 주었으니 의롭다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마음가짐

    사람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밝히 드러나 있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마음가짐은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납니다. 안 걸리는 상황에서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지옥불로 생생하게 느끼면서 하나님을 모든 면에서 경외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안 보이니까 안 걸리니까 약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고 무시하면서도 살인하지 않았으니 나는 의롭다, 다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 아내를 버리면서도 이혼 증서를 써 주었으니 나는 의롭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가르치는 의의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모든 것을 보시고 판단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의가 아니라 죄입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신자의 의는 다릅니다. 믿는 자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존중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니 자기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항상 힘씁니다. 모든 이를 존중합니다. 음욕이 생기지 않기를 깨어 간구합니다. 눈에 파수꾼을 세우고 잘 관리합니다. 모든 이를 정결한 마음으로 대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나라에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고 자기가 의로워서도 아니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의로움입니다. 이러한 의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나 자신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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