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5장 후반부, 심판을 선포해야 하는 일의 고달픔과 하나님의 입이 되는 것의 영광

2023. 8. 6. 10:59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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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5:10-21

찬송가 395장 자비하신 예수여


심판을 선포하기 때문에 재앙을 당하는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15장 앞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이미 정하셨다는 것을 선포해야 했습니다(15:1). 그 심판은 죽음과 칼과 기근과 포로됨이었습니다(15:2).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남은 자도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9). 이러한 재앙 선포는 예레미야에게 재앙으로 다가왔습니다(10절).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10절 상)" 예레미야는 자기가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항시 만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한탄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다투고 싸우는 자와 만나는 것은 심히 괴로운 일입니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과 싸우는 자들인 그들에게 재앙의 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더 싸우려고 덤벼들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10절 하)" 사람이 채무 관계가 있으면 관계가 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과 그 어떤 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 관계가 상할 일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다 자기를 저주하였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심판을 선포하는 대상이 모든 사람과 다투고 싸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한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이러한 예레미야의 한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강하게 할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이 말씀은 곧 이루어집니다. 예레미야 21장에 1-2절에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을 보내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라고 합니다. 바벨론이 와서 치는 환난을 당하자 그동안 그렇게 박해했던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간구했습니다. 뒤에 37장 3절에서도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라고 하였습니다. 38장 14절에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개인적으로 은밀히 불러서 조언을 구합니다. 나중에는 바벨론의 침공에서 살아 남은 백성들도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기도해 주기를 구했습니다. 42장 2절에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되고 모든 입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게 됨 

하나님께 반역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재앙을 당하자 그렇게 다투고 싸우고 대적하고 박해하던 예레미야에게 와서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을 그렇게 대적하던 사람들의 모든 무릎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앞에 꿇게 되는 것의 모형입니다(빌 2:10). 예수님께서는 제 2위이신 하나님으로서 사람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까지 사람들의 대적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되었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되었습니다(빌 2:8, 10-11).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결국 승리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역자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여 대적을 받고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대적을 이길 수 없다면 

12절에 나오는 북방의 철과 놋은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이렇게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 중에 아무도 바벨론을 꺾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범한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제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13-14절)" 아무도 하나님의 백성을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이 죄를 지으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니 죄가 자기를 망하게 하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대적을 이길 수 없다면 혹시 내가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을 들어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대적을 이길 수 없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쫓겨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대적의 지배를 받아 자유를 상실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무서운 적은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항상 우리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 우리의 죄입니다. 

 

예레미야 15장 후반부, 심판을 선포해야 하는 일의 고달픔과 하나님의 입이 되는 것의 영광

죄가 우리를 멸할 수 없음 

우리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기쁨과 감사 거리를 찾기보다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기쁨과 감사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 있게 의지하고 있어서 죄가 우리를 멸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를 깨닫고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 있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임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계속되는 한탄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바벨론으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시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계속 한탄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15절)"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나님께 한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는 자마다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이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7절)"라고 고백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의 편에 서는 사람이 없고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붙들려서 홀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는 하나님의 분노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노로 재앙의 말을 선포하며 사람을 치니 그 누구도 그와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한 것은 그가 성정이 비뚤어지거나 성품에 화가 많거나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16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이 그의 양식이 되어서 그의 속에 깊이 들어가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가 그의 안에 가득하여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기대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심 

보통 하나님과 가까이하여 깊이 교제하는 상태에 들어가면 기쁨과 감사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18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되고 그것이 기쁨과 즐거움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사람들의 대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죽이려고 하여 위협하고 박해하는 것에 밤낮 시달렸습니다. 이런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으로 그를 격려하셨지만 박해는 끝나지 않으니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라모 불평까지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19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헛된 것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마음 쓰는 것은 고통이 언제 끝날 것인가 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고 자꾸 그것을 말하기 보다 귀한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귀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끝까지 계속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선지자는 쉽고 즐겁게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그 말씀에 아멘하고 그를 받드는 것이 그의 존재 목적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 수반된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자기를 대적하는 것에 너무 마음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라는 말씀으로 예레미야가 마음을 다잡도록 권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해 주시는 것들 

하나님께서 해 주실 수 있는 것은 고통이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오고 예레미야가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셔서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그를 이기지 못하도록 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예레미야를 치고 죽이려고 하여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함께 하셔서 그를 구하여 건져 주시기 때문입니다(20절). 악한 자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십니다(21절). 이것은 예레미야가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입니다. 예레미야는 원하는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완수할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로서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여 죽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크고 무서우셨는지 하나님께 그 잔을 면해 달라고 간구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하는 소원을 올려 드렸습니다. 모든 사명자의 길이 다 형통한 길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형통하여 평생을 평안과 기쁨과 감사로 살며 다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 때문에 핍박과 박해와 다툼과 대적을 당합니다. 평생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사람들 가운데 높아지지도 못합니다. 사람은 모두 형통한 길을 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때와 시기에 알맞게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려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아버지여 그것이 참 어렵고 제가 감당하기 너무 버거운 일이지만 저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간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간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시고 어려운 처지에서 구원해 주시고 새로운 힘을 주셔서 기쁨과 감사가 다시 넘치도록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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