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5장 전반부, 재앙은 쉽게 임하지 않음, 죄의 무서운 결과와 십자가

2023. 8. 5. 13:44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예레미야 15:1-9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예레미야의 간구에 거절로 응답하심과 십자가 

앞의 14장에는 가뭄 재앙과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 예레미야의 간구가 나옵니다. 이 간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거절로 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에 긍정으로 응답하시기도 하시고 거절로 응답하시기도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14:21)"라고 간구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거절로 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이미 예레미야의 간구가 응답되었는데 십자가로 응답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언약의 저주가 예수님께 내려졌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언약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하신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반드시 벌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그냥 넘기는 것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받을 벌은 바로 하나님과 단절되는 벌입니다. 

십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바로 전에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람어인데 번역하자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가 되는데 이것은 시편 22편 1절에 그대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편 22편 1절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멀리하셨다는 말씀은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1절)"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즉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서 하나님께 닿을 수 없는 절망감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편 22편과 예레미야 15장 

시편 22편을 잘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서 당하는 일이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거기에 많은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시편 22편 12절에 보면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 쌌다고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개들이 나를 에워쌌다고 하고 같은 절 하반절에 보면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다고 합니다. 20절에는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라고 간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21절에서는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을 보시면 3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네 가지의 벌은 사방으로 임하는 재앙을 뜻합니다. 이 재앙은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지 피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그런데 이 재앙에 등장하는 것들이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입니다. 시편 22편에 나오는 바산의 황소와 개와 칼과 사자의 입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고통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실 때 예수님은 시편 22편을 경험하셨습니다. 시편 22편은 마치 십자가를 보고 있는듯이 수족을 찌르는 것과 조롱하는 것 등 십자가의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그 심판을 누가 온전히 당하셨는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서 하나님께서 멀리하시고 돕지 않으시는 고통, 사방이 재앙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무한히 다가오는 그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여섯 시간 동안 다 당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영원히 당해도 다 당하지 못할 고통, 모든 인류가 다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다 당하지 못할 그 고통을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형벌, 죽음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는 고통이 얼마나 크고 무한한 것인가를 다 당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15장 전반부, 재앙은 쉽게 임하지 않음, 죄의 무서운 결과와 십자가

 

죄의 무서움을 알아야 함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납니다.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1절 하)"에 이어지는 말씀은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2절)"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면 죽음과 칼과 기근과 포로됨이 닥쳐옵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좋은 것은 없습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데 그 하나님에게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냥 죽거나 칼에 상하여 비참하게 죽거나 기근으로 굶어 죽거나 포로가 되어서 자유를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거나 다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네 가지 다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수반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면 이런 고통을 당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죽으면 끝이 아니고 거기서부터 고통이 또 시작됩니다. 살아있을 때보다 더한 고통,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이 계속되는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므낫세의 죄 

그런데 특별히 어떤 죄의 결과로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당하게 되냐면 바로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죄의 결과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4절)" 므낫세의 행적은 열왕기하 21장에 나옵니다. 므낫세는 열두 살에 왕이 되어서 55년 동안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왕하 21:1).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는데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을 위해서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했습니다(왕하 21:2-3).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의 성전 마당에다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왕하 21:5) 자기가 만든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습니다(왕하 21:7). 왕이 그렇게 악행을 저질렀는데 그러면 그 백성은 어떻게 했느냐, 그 악행을 백성들도 본받아서 모든 민족보다 더 심하게 죄악을 저질렀습니다(왕하 21:9, 11). 므낫세는 거기에 더해서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서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습니다(왕하 21:16). 예레미야 본문에서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4절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사건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백성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재앙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6절 상)"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므낫세가 세운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길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5절). 예루살렘의 자식들이 다 끊어지고 그 백성들이 다 멸망받게 되었습니다(7절). 예루살렘 성의 과부가 바다 모래보다 많게 되고 그 안에 거하는 여자들에게 놀람과 두려움이 갑자기 닥치게 되었습니다(8절). 일곱을 낳은 여인이 쇠약해서 기절하고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지고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되었습니다(9절). 혹시 남은 자가 있으면 그들도 대적의 칼에 죽게 되었습니다(9절 하). 이것이 므낫세의 죄, 즉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격동하시게 한 죄의 결과입니다. 이 죄는 므낫세만의 죄가 아니고 므낫세를 따른 모든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였습니다. 

수도 없이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 

이런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니로다(6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앙은 쉽게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서슴없이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앙이 내리기 전에 수도 없이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오죽하면 이런 재앙을 내리실까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격동시켰으면 저렇게 재앙을 내리실까 생각해야 합니다.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증하고 부정한 것을 들이미는 것입니다. 성전에다가 우상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 떡하니 아세라 상을 세워 놓는 것이 바로 그런 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굉장히 패역한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아버지가 아무 말 안 한다고 아들이 아버지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고 심지어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아버지의 침상에 두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언젠가는 마음을 고쳐먹겠지 하면서 참고 참고 뜻을 돌이키고 돌이키지만 끝까지 변하지 않고 더 심각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이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패역한 자식들이 바로 우리들임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바로 그런 패역한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누가 쫓겨나서 무한한 고통을 당했느냐,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상이 득실득실한 우리 속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된 우리 속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는 자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아직 연약하여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짓기도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꾸미고 죄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이스라엘의 역사와 십자가로 밝히 알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사건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