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8장 중간,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의 위험성

2023. 7. 23. 10:48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예레미야 8:4-17

찬송가 206장 주님의 귀한 말씀은


죽음의 순기능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은 극악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악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그런 악은 제어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이 얼마나 극악한지를 알려주시면서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심판은 죽음이었습니다(8:1-3). 사람의 죽음은 사람이 짓는 죄와 악을 멈추게 합니다. 바벨론이 와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치는 것은 죽음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죽음은 심판이면서 동시에 악을 멈추는 도구입니다. 부활할 수만 있으면 죽음은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죽음은 죄악을 멈추고 죄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합니다.

죽음이 순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죽음을 대신 맛보시고 대가를 다 치러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부활하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악을 무력하게 하시고 죄의 값을 다 치르심으로 부활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그 고통의 끝에 있는 죽음은 절대 신자들을 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신자들에게 선을 이루는데 그들을 더욱 겸손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힘있게 의지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은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신자들이 당하는 죽음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심판으로 영영 하나님과 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징계로 다시금 하나님께로 붙들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은 생명의 양분이 됩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더 크게 자랍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함 

이어지는 말씀에는 죄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얼마나 거짓에 잘 속는지가 나옵니다.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4절)" 이 말씀은 자연의 이치로 영적인 원리를 깨달으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이런 식의 말씀이 뒤에 계속 이어집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이치이고 나갔으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게 행동합니다.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였도다(5절)" 떠났으면 돌아오는 것이 이치인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을 더 고집합니다.

하나님의 규례의 의미를 알지 못함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려가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6절)" 여기서 정직을 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그들이 자기 행위의 진상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행위 그대로를 말하지 않으니 그들은 악을 뉘우치지도 못합니다. 자기 행위가 자기 보기에 옳게 보이기 때문에 자기 행위가 얼마나 죄 가운데 있는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고 전쟁터로 달려가는 말같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달려갑니다. 자기가 틀렸다고 깨달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능으로만 사는 새만도 못한 것입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7절)" 이 새들은 기후에 따라서 거주지를 옮기는 철새들입니다. 철새들은 때와 시기를 정확하게 알고 날아갔다가도 정확한 때에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자세히 살피면 그 규례에 정한 절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 안식일마다, 유월절마다, 칠칠절마다,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마다 하나님께 나아와야 했습니다. 죄악으로 멀리 나갔다고 하더라도 절기를 지켜 돌아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죄를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기회가 7일마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규례를 외면적으로는 지키면서도(7장 참조) 그 규례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함 

그렇게 알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자기들이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8절)"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 2:23)"라고 말합니다. 딱 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우리도 들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할 때 그 말씀의 뜻을 깊이 알고 깨닫고 그대로 행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만큼 우리의 삶에 그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되지 않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스스로 어리석기 때문에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것이고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의 깊에 살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안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높이고 지혜 있다고 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긍정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8장 중간,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의 위험성

 

들음과 행함 사이에, 모든 것은 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이렇게 나옵니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가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9절)" 이들이 스스로는 여호와의 율법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다고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들었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들었으면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법을 우리에게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법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랑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돌르 자랑할 뿐입니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예수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샬롬을 외치는 선지자와 제사장 

여호와의 말씀을 버린 사람들은 그 결과를 그대로 당합니다. 신명기 28장 30절에 나온 저주를 당하는데 그것은 아내도 빼앗기고 자기 소유의 밭도 빼앗기는 저주입니다. 그들이 이런 저주를 당하는데 일조한 사람들이 선지자와 제사장입니다.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10절)"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거짓을 행하는데 그들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평강이 없었습니다(11절). 여기서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입니다. 샬롬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부터 해서 이웃과의 관계, 사회 제도 등이 다 잘 돌아가는 상태가 샬롬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정립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예배 드리는 것이 잘 돌아가는 것이 먼저인데 우상을 숭배했으니 샬롬이 있을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런데도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평강하다고 했습니다. 심각한 거짓을 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엎드러지고 아예 거꾸러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일어날 수 없도록 아주 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시대 목회자들에게 경정을 울리는 말씀 

이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역자들에게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교회 목사로서 심방을 할 때 평강을 말할 수 없는 집에 평강을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꾸짖으면서 돌이킬 것을 가르치는 목회자가 굉장히 드물어졌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개교회주의와 수평이동의 폐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목회자는 영적인 사안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권면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외부 상황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평강을 외칠 수 없는 곳에 평강을 외치고 복을 빌 수 없는 곳에 축복하는 일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이 이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거꾸로 하는 분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이들에게 거꾸로 꾸짖고 하나님의 뜻을 틀리게 전하여 상심시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와 교역자는 이런 양극단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거짓 평강을 외치는 것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복이 이제 상실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13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안 그러면 이들은 계속 평강하다, 평강하다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여전히 있으니 평강하다고 하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있으니 평강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비유적으로 사람들을 가리키고 그 열매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수고의 열매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평강이 사라지리라는 뜻입니다. 평강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상태인데 아무리 포도원을 가꾸어도 열매가 하나도 맺히지 못하고 아무리 무화과나무를 가꾸어도 열매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을 보면 아, 정말 평강이 없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거짓에 농락 당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 밖에는 그 백성을 이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와 말 때문에 진멸당할 처지에 들어간 것입니다. 

재앙을 당하나 돌아오려고는 하지 않음 

그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14절)"라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뉘우침이 전혀 없는 태도입니다. 뉘우쳐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가 아니고 모여서 멸망하자는 태도입니다. 그러면서 원망하기를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15절)"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그 말씀을 듣기도 싫어하고 그대로 행하기는 더더욱 싫어하면서 왜 혜택은 주지 않으냐는 원망입니다.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그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켰도다(16절)" 자기들의 행위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버티면서 자기들이 당하는 악한 일만 나열하고 있습니다. 말들이 북쪽에 있는 단에서부터 내려와서 땅을 진동시키고 점령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사로잡는 것에 대한 원망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세대에게 내리셨던 재앙과 같은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17절)" 이 사건은 이미 민수가 21장 6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놋뱀이 등장하고 누구든지 놋뱀을 보는 사람마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놋뱀처럼 예수님도 들려야 한다고 하면서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것이 원망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답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할 기회 

원망할 만한 일이 생겼을 때가 기회입니다. 바로 자기 믿음을 점검할 기회입니다. 자기가 혹시 거짓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기회입니다. 거짓 평강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는지 점검할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잘 잡으려면 스스로 지혜 있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 태도를 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 분을 바라보면 평강을 회복합니다. 자기 지혜를 버리고 더 나아가 자기 의를 버리고 그분을 바라보아야만 평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은혜로 안아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도 힘있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