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마태복음 8장 22-34절 | 죽음을 잔잔하게, 예수님 앞에 바짝 엎드리는 바람과 바다

2023. 2. 6. 07:02성서유니온 매일성경/마태복음

목차


    마태복음 8:23-34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려고 오셨습니다(마 8:17). 사람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시려고 오셨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연약하신 분이신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사이에는 위계가 있습니다. 보통 위계상 낮은 사람이 허드렛일을 하게 마련입니다. 육체적으로 힘쓰고 이리 가고 저리 가는 일을 낮은 직급의 사람들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무질서와 죽음을 상징하는 바람과 바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분이십니다. 마태는 그곳을 바다라고 기록하면서 구약의 바다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옵니다. 성경 전체에서 바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바다라고 칭하는데 이런 면에서 바다는 죽음과 연결됩니다. 성경은 바다를 각종 괴물의 서식처요 무질서와 죽음이 관할하는 곳으로 봅니다. 이런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믿음의 특징

    그 상황을 본 제자들은 자기들이 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바다라는 죽음의 세력에 굴복한 모양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특징 하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날뛸 때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 아무리 죽음이 날뛰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제어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세력을 꾸짖으시자 "아주" 잔잔하게

    과연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꾸짖으실 수 있는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시자 바람과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됩니다. 여기서 아주라는 말은 직역하자면 "크게"라는 뜻입니다. 잔잔하게 되는데 완전히 고요하게, 완전히 잔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엄청나게 일어나던 놀이 순간 고요하게 되어 물 위가 마치 거울처럼 착 펴졌다는 말입니다. 물 위에 그 어떤 파장도 없어진 것입니다.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바짝 엎드려 완전히 가만히 있게 된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유리바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유리바다가 등장합니다. 유리바다는 바다이긴 한데 놀이 전혀 없는 완전히 고요한 평평한 바다를 가리킵니다. 이 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이제는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세력이 더 이상 신자들을 위협하지 못함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권능으로 사람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심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하심은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가 죽음의 세력을 아주 잔잔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약하셔서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하시는 분이 아니요, 능력과 권능에 있어서 무한하신 분이신데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귀신을 제어하셔서 길을 여심

    이어서 등장하는 사건은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자 둘을 온전하게 하신 일입니다. 이 사건은 바람과 바다에 이어서 영적인 세력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 귀신 들린 자 둘 때문에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28절).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내쫓으셔서 그 사람을 온전하게 하시고 또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고 그 길을 이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보시면 귀신들이 예수님께 굴복하는데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하러 오신 분이 무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하나님이냐, 바람과 바다, 즉 죽음의 세력을 잔잔하게 하셔서 배가 평안하게 목적지에 당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요, 귀신을 제어하심으로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격적 피조물의 자유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인격적 피조물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귀신들은 이제 이 사람에게서 나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나오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눅 8:29). 그렇다고 무저갱에 들어가는 싫습니다(눅 8:31). 그래서 예수님께 청원합니다. 돼지 떼에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원을 들으시고 허락하십니다. 

    여기서 귀신들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아닙니다. 악한 천사들입니다. 이들도 인격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냐면 선을 딱 그으시고 허용하시는 방식으로 다루십니다. 이 사람에게 계속 있으면서 이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안 된다는 선을 딱 그으십니다. 그렇게 하고 다른 것은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께서 자유를 보장하시고 허용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어찌 악한 귀신의 청을 들으시고 허용하시는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의 악함을 얼마나 크신 은혜로 허용하고 있으신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격적 피조물들의 자유를 보장하시는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유까지도 허용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을 포괄하셔서 선을 이루실 수 있으실 정도로 크신 분이십니다. 그 일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하러 오심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시러 오신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분이십니다. 죽음의 세력에게 명하셔서 잠잠하게 하실 수 있으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군대 귀신도 제어아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이 지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모두 다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의 구원은 이러한 것이라,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은 이런 분이시라, 이것을 가르쳐주는 의미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고 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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