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디모데전서 6장 11-21절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2024. 11. 11. 07:00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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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디모데전서 6:11-21

    찬송가 328장 너 주의 사람아


    1장과 6장

    디모데전서는 1장과 6장이 같은 주제를 말씀합니다. 그 주제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1:3; 6:3)과 선한 싸움(1:18; 6:12)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교역자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 서신인 디모데전서에서 이 두 가지를 맨 앞과 맨 뒤에 배치함으로 이 두 가지 주제를 꼭 기억할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아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1절은 "너는 그러나(Σὺ δέ)"로 시작합니다. 디모데 너는 앞에 나오는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앞의 구절에 나오는 사람은 다른 교훈을 하는 사람들(6:3)로서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고(6:5) 부하려 하고(6:9)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6:10). 디모데는 이런 사람과 대조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교역자는 선지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피해야 할 것

    하나님의 사람인 교역자는 "이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3-10절에 나온 것들입니다. 교역자는 다른 교훈을 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부하려 하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들을 피하라고 하는 이유는 교역자가 이런 것에 빠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따라야 할 것

    교역자는 피하는 동시에 따라야 합니다. 교역자가 따라야 하는 것은 여섯 가지로 나오는데, 첫째는 의요, 둘째는 경건이요, 셋째는 믿음이요, 넷째는 사랑이요, 다섯째는 인내요, 여섯째는 온유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여섯 가지를 둘씩 묶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7쪽). 

    "의와 경건"은 분리될 수 없다. "의" 없는 경건(敬虔)이 있다면, 그것은 미신(迷信)이고, 참된 "경건" 없는 의가 있다면 그것은 조화(造花)와 같고 흐르지 않는 썩은 물과도 같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敬畏)함이니 의(義)의 근원이다. 
    "믿음과 사랑"도 역시 뿌리와 열매처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믿음"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은 생명 없는 것이다. "인내와 온유"도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진다. "온유"의 덕은 "인내" 없이 성립될 수 없다. 

     

    잘 살펴보면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여섯 가지 덕을 둘씩 짝지울 때 그 의미가 더 잘 드러납니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도덕이나 윤리를 말함이 아닙니다. 앞에서 돈을 사랑하는 거짓 교사들이 나온만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특징을 가져야 합니다. 그 특징이 바로 앞에 나오는 여섯 가지 덕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믿음의 선한 싸움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여기서 싸움(ἀγῶνα)은 운동 경기에서 경주하면서 분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믿음이 경주로 비유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7쪽). 

    왜 신앙생활을 가리켜 선한 경주로 비유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단자들의 투장(5절)은 육체적 탐심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악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믿으려는 믿음의 "싸움"은 그 목적이 선하여 "영생"(永生)을 위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믿음의 싸움은 방법도 선하여 시기, 질투, 악독을 동반(同伴)하지 않는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영생을 향해서 달려가는 싸움입니다.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이것이 시기나 질투를 동반하지 않는 이유는 이 싸움의 푯대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푯대인 영생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를 보고 시기하거나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이는 자기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고 나는 나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즉 영생을 취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사용하실 때에, 특별히 교역자를 부르셔서 사용하실 때에는 그 교역자가 영생을 취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쓰시고 버리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의 부르심은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한 부르심입니다. 여기서 많은 증인 앞에서 증언했다는 것은 교회 앞에서 증언했다는 뜻입니다. 그 일이 선한 증언인 것은 디모데가 믿음과 덕으로 복음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서 인정 받았기 때문입니다(Calvin).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인정받은 자일수록 더욱 근신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더 싸워야 한다. 이것은 그가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서가 아니고 복음의 명예를 위하여 싸워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8쪽).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바울은 다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 디모데를 세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을 특별한 수식어로 묘사합니다. 먼저 하나님께는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살게 하신(ζωογονοῦντος)은 현재 시제입니다. 만물을 계속 살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8-589쪽). 

    디모데는 그의 증거운동 곧 믿음의 선한 싸움에 있어서 죽음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살려주시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죽음문제도 해결하여 주신다. 

     

    디모데가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했는데(12절) 예수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셨습니다(13절). 이 증언은 예수님 당신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9쪽). 

    그리스도의 이 증언은 그가 땅위에서 최후로 법정에서까지 자기에게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 모든 증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빌라도를 향하여 증거하신 "선한 증거"의 내용은 그가 천국의 왕(메시야)이시라는 것이다(요 18:33-37, 19:10-11).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증언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 

     

    디모데의 선한 증언은 예수님의 증언 안에 포함됩니다. 디모데가 증언하는 이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증언하는 사람은 영생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지금도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당신님을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길인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바울은 특별히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증언하셨다는 것은 곧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길로 나아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증언은 "선한 증언"입니다. 이 예수님의 증언 안에서 교역자의 증언도 선한 증언이 됩니다. 교역자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서 교역자의 증언이 "선한 증언"이 됩니다. 이 선한 증언은 듣는 사람을 영생으로 이끕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를 명하노니"라고 합니다. 이 명령은 곧 생명과 연관된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교역자라면 항상 주의해서 지켜야 하는 명령입니다. 

    재림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바울은 때를 지정합니다. 그 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입니다. 그러니까 교역자는 항상 예수님의 재림과 이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그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합니다. 흠과 책망은 어떤 심판을 생각하게 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부터 흠을 잡히지 않으려고 또는 사람에게 책망을 받지 않으려고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것을 바라보면서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흠이 되거나 예수님께 책망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 명령"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9쪽).

    "이 명령을 지키라" 이 말은 디모데전서에 기록된 모든 목회법(牧會法)을 지키라는 것이다. "명령"이란 말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1) 11-12절에 포함된 명령이라고 함(Weiss). 2) 이 서신에 있는 모든 말씀을 가리킨다고 함(Dibelius). 3) 십계명을 가리킨다고 함(Baldensperger). 4) 기독교의 구원교리를 가리킨다고 함(Belser, Meinertz, Wohlenberg). 5) 디모데가 받은 전도자의 책임을 가리킨다고 함(Ridderbos, Bouma, Schrenk). 이 해석이 가장 합당하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멸영"이란 말이 본서에 기록된 모든 목회훈(牧會訓)을 가리킨다는 해석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기약이 이르면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기약"이란 말(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정해진 시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시간을 복수로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한 시점에 재림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울이 복수를 써서 정해진 시간들이라고 쓴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은 단수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14절은 재림을 의미합니다. 15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보이시는 때들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여러 번 재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을 각각의 정해진 시대에 알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깨어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92쪽). 

    "복되시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복의 근원되심을 의미한다. "유일하신 주권자"란 말은 악을 제어하시는 진정한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이다. "만주의 주"란 말은 그 앞에 있는 "만왕의 왕"을 반복한 것이다. 이 세상에 "왕"들이 많으나 그들은 유일하신 "왕" 하나님에게 복속된 것이다. 계 17:14 참조.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디모데가 푯대로 삼아야 할 영생(12절)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살게 하실 수 있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으로서 영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영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영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십니다. 이것을 요한은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라고 표현합니다(요일 1:5). 이 말은 하나님께는 거짓이 전혀 없으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떤 숨은 의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진실하셔서 환하게 비추십니다. 그런데 이 빛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는 강렬한 빛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또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영생과 연관됩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 영생은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부한 자들에 대한 권면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에게 명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교회는 즉, 교역자는 부한 자들을 특별히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을 높일 위험이 있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둘 위험도 있기 때문입니다(17절). 부한 자들을 잘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복된 위치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부한 자들을 잘 교육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선한 사업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8절). 그들이 가진 부는 또 하나의 은사입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능력 있게 감당하게 지도하면 그들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게 됩니다(19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21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20-21절에서 1장에서 권면한 것을 다시 권면합니다. 그렇게 하고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바울은 권면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디모데를 부탁합니다. 교역자가 교역자 답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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