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0.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전서
목차
디모데전서 6:3-10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다른 교훈을 하는 자에 대한 경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어떻게 행할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3:15). 거기에 큰 가르침으로 성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부와 장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훈했습니다(5:1-25). 이어서 종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도 가르쳤습니다(6:1-2). 이어서 앞에서 경고했던 거짓 교사(1:3-7)에 대해서 다시 경고합니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바른 말
바울은 다른 교훈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다른 교훈의 반대는 "바른 말"입니다. 이 바른 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4쪽).
여기 "바른 말"이란 것(ὑγιαίνουσιν λόγοις)은 "건강한 말씀"이라고 직역된다. 교훈이 건강하다 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성경)에 부합하도록 모든 교훈을 각기 경중(輕重)과 각기 위치대로 바로 주장하며 실현함을 가리킨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이지만 거기에 이르기 위한 진리들의 비중은 서로 다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길을 갈 때에 우리 몸의 방향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는 몸의 운동은 여러 가지 인데 그것들을 선히 조절함과 같다. 우리는 걸어갈 때에 체중(體重)의 중심을 맞추는 신경(神經)의 작용이 있으며, 왼발과 바른발, 그리고 두 발이 서로 교체(交替) 협력하는 작용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사상도(신앙생활도) 한 가지만 강조함은 건강하지 못하다. 다른 것들은 무시하고 한 가지만 위주하다가는 기형적(畸形的)이 되며 병적(病的)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동시에 성경도 상고하고 깨달아야 하며 실행해 옮기기도 해야 된다. 우리의 교회 생활도 역시 잘 조절해야 된다. 교회는 순결을 위주하는 동시에 화평을 구하여야 된다. 어떤 때는 교회의 순결을 위하여 신령한 싸움을 한다. 거기에 많은 정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게 하는 중에 약해진 방면이 확실히 생긴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곧, 그런 교회의 교인들이 권위에 대해 무시하는 습성이 생기고, 평화 건설 노력이 쇠퇴된다. 이 점에 있어서 선히 조절하여 약해진 부분을 보강시키고 불순한 것은 성화 또는 정화시켜야 한다. 진리를 위하여 싸우던 교회가 이 점을 예비적으로 경계하지 않으면 분열을 거듭할 위험성이 있다. 칼빈과 멜랑톤은 지엽(枝葉)문제에 차이가 있었으나, 그 지도 원리가 공통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끝까지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진리를 위하여 구교(천주교)와 싸웠고 거기서 분열되었으나, 신교(기독교) 안에서 단합할 것과 조화할 것과 통일할 것을 언제나 주장하였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하고 적실한 목회 조언입니다. 신령한 싸우을 하는 교회는 화평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점을 인지하고 "예비적으로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예비적 경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목회자가 성도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바른 말이란
사도 바울은 바른 말이 무엇인지를 뒤에 잘 써 놓았습니다. 바른 말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대한 교훈"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다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친히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경건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의 기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기에서 떠난 것이 다른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그 말씀의 뜻과 행하신 일의 의미를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 수준의 뭔가를 덧붙여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다른 교훈입니다. 이런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의 특징은 4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는 교만하여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교만하다라는 말(τυφόω)은 문자적으로는 연기나 구름이 가득해서 앞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무감각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위치와 처지인지를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무한히 아름다우시고 정결하십니다. 그 앞에서 사람은 낮고 더럽고 추합니다. 이것을 잘 보고 아는 것이 바로 영적인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연기가 가득해서 그것을 알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높고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높고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교훈을 합니다. 사람 수준에서 이것이 깨끗한 길이다, 바른 길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 수준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두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상관 없이 자기가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교만한 가르침입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이런 사람은 많이 아는 것 같으나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4:6). 예수님을 제쳐주고 사람 수준에서 뭔가를 안다고 하면 사실 그것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르면서도 자기가 모른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자꾸 변론과 언쟁으로 나아가는데 왜냐하면 복음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론과 언쟁
교만하여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변론과 언쟁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투기(φθόνος)는 다른 이의 기쁨을 언짢아 하고 다른 이의 불행을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심히 죄된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에 보면 빌라도가 대제장들과 장로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알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나오는 "시기"가 바로 4절의 투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 투기가 심히 죄악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리에 자꾸 다른 것을 올려 놓으려고 합니다. 분쟁(ἔρις)은 갈등, 불화, 다툼을 뜻합니다. 비방(βλασφημία)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내서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비방입니다(롬 1:25). 악한 생각(ὑπόνοιαι πονηραί)은 악한 의심입니다. 예를 들어, 혐의가 없는 사람에게 어떤 혐의를 덧씌우는 생각이 바로 이 악한 생각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오는 것들입니다.
도덕이나 윤리의 차원을 초월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라고 할 때, 우리는 자꾸 이것을 도덕이나 윤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이나 윤리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투기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자꾸 드러내기 때문에 갈등과 불화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분쟁입니다. 비방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인데 그것을 제쳐두고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비방입니다. 악한 생각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자꾸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구원하려는 생각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영적인 것들입니다.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4절과 5절은 한 문장입니다. 주동사는 4절의 "그는 교만하다(τετύφωται)"입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이 변론과 언쟁으로부터 여러 가지 것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과(4절) 다툼(5절)입니다. 이 다툼이란 말(παραδιατριβή)은 아무 쓸모 없는 논쟁을 뜻합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아무 쓸모 없는 직업, 또는 사업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뭔가 열심히 말을 하고 뭔가 있는 것 같이 어떤 일을 도모하고 경영하지만 그 결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고, 전혀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투기, 분쟁, 비방, 악한 생각, 다툼)가 교만한 교역자, 특별히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교역자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마지막에 나오는 다툼은 첫째, 사람의 마음이 부패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교만하다는 것이 연기가 자욱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부패하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지성(νοῦς)을 뜻합니다. 부패했다는 것은 썪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썪으면 쓸 수 없게 됩니다. 즉 지성이 썪었기 때문에 뭔가 안다고는 하지만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지성으로는 뭔가 판단을 내릴 때 그 결론도 당연히 썪은 것이 됩니다.
진리를 잃어 버러
다툼은 둘째, 진리를 잃어버린 것에서 나옵니다. 논쟁이나 싸움이 뭔가 의미가 있으려면 진리를 가지고 있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잃어버렸으니 거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다툼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다툼은 셋째, 경건을 이익의 방도(πορισμός)로 생각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ὠφέλιμος, 4:8). 하지만 여기서말하는 것은 경건을 금전적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6:24). 그러므로 경건을 금전적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히 여기고 재물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육체적 이익을 거두기 위하여 종교(혹은 경건)를 영업화(營業化)"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불의한 영리적 종교생활은 옛날부터 이단자들이 취하여 온 것인데, 정통적 복음의 교역자들도 혹시 탈선하여 그리한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5쪽).
진정한 이익의 방도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경건은 정말 진정한 이익의 방도(πορισμός)입니다. 어떨 때에 그렇게 되냐면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렇게 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5쪽).
이 말(αὐτάρκεια)은 신자가 자기가 모시고 있는 하나님으로 만족함을 가리킨다. 1) 자족하여 탐심을 모르는 경건은 참된 경건이기 때문에, 그런 경건의 소유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큰 유익을 얻고(시 23:1; 합 3:19 참조), 2) 그런 참된 경건의 소유자는 내세(來世)의 큰 영광을 누리는 큰 유익을 얻는다. 4:8 참조.
이것이 경건의 핵심입니다. 자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이고 이러한 경건은 모든 것에 유익이 됩니다. 특별히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러한 경건은 내세의 큰 영광을 누리는 큰 유익으로 이끕티다.
실물 설교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이 옳은 태도라는 것을 7-8절에서 설명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6쪽).
욥 1:21; 전 5:15 참조.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지 않았던 것들(물질이나 기타 이 세상 것들)을 원치 않고, 그것들을 초월(超越)하게 하는 경건을 소유하면 우리는 참으로 부유(富裕)하다(Wiesinger). 우리가 날 때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한 실물 설교이다. 곧, 인간의 본연은 적신(赤身)이기 때문에 언제나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마음 자세로 살아야 된다는 설교이다. 우리가 소유해야 할 이와 같은 심리는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심리이다.
자족하는 마음이란
자족하는 마음은 곧 눈에 보이는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탐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6쪽).
이것은 의식주(衣食住)를 위하여 필요한 것 이상의 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탐심은 결국 사치한 생활을 원함이니 무의미한 것이고 죄악이다. 본절의 말씀은 성빈주의(聖貧主義)를 장려함이 아니다. 즉, 가난 자체가 거룩하다는 교훈이 아니다. 잠 30:8-9; 마 6:11 참조.
여기서도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가난 자체가 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은 "부하려 하는" 사람입니다. 부하려 하는 사람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부하려 하는 자는 속히 부하려 하기 때문에 모든 불의한 취재(取財)방법을 기탄 없이 취하게 된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586쪽). 사람이 점점 부해지는 것(πλουτέω)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풍성하십니다.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에 그 풍성함을 나타내셨습니다.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습니다. 씨 하나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이나 풍성함은 시간에 비례해서 늘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람이 점점 부유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문제는 박윤선 목사님이 잘 말씀하신 것처럼 속히 부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해 들어간다(βούλομαι)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하심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채워지고 쌓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적극적으로 욕망하고 추구하고 바라고 의도하는 것입니다.
시험과 올무와 욕심에 떨어짐
그렇게 적극적으로 부자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시험과 올무와 욕심에 떨어집니다.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ἐμπίπτουσιν)은 현재시제로 쓰였습니다. 즉, 계속 그 안으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되기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시험과 올무와 욕심 안으로 계속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은 유혹이고 올무는 덫입니다. 그리고 욕심은 정당한 욕심이 아니고 뒤에 어리석고 해롭다는 말이 수식어로 따라오는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심은 정당한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즉 시험과 올무와 욕심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으로 이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 뿌리에 있는 것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으로 큰 유익을 받습니다. 반면 자족하지 않고 부자가 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들어가면 결국 멸망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멸망에 들어가는 그 뿌리가 무엇이냐면 "돈을 사랑함(φιλαργυρία)"입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재물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것이 바로 그 뿌리입니다. 사실 이것은 모든 그 악의(πάντων τῶν κακῶν) 뿌리입니다. 여기서 "그 악"은 앞에 나온 시험과 올무와 욕심에 떨어지는 것, 그리고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악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멸망에 빠지게 되는 그 근원을 자세하게 살펴보니까 거기에는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무서운 마음 상태가 딱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냐 하나님이냐 할 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택하며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탐심과 미혹
자족하는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은 탐내는 사람입니다. 탐내는 사람은 미혹을 받습니다(ἀποπλανάω). 미혹을 받는다는 것은 잘 가던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나아가던 길에서 이탈하여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이리저리 향방없이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던 것에서 떠나서 많은 감정적인 고통들(ὀδύναις πολλαῖς)로 자기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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