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9. 16:07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마가복음
목차
마가복음 13:1-13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상과 정반대의 복음
마가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1:1). 이 복음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구원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오히려 이방의 구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메시아의 높아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메시아의 고난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높아지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을 향해서는 심판을 절대 빈곤층을 향해서는 칭찬을 담고 있습니다(12:38-44).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복음은 성전 영광의 회복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성전의 무너짐을 담고 있습니다(13:1-2). 복음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 대한 질문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성전의 돌들과 건물들이 어떠할지를 여쭈었습니다. 이 질문을 한 제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성경이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층 고조된 분위기를 감안할 때 이 제자는 하나님 나라가 회복될 때 성전이 어떻게 영광스러워지는지에 대해서 여쭌 것 같습니다. 당시 성전은 굉장히 컸습니다. 크고 귀한 돌들로 40년 넘게 공사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권을 잡으시면 그 영광이 얼마나 더 커질 것인가 궁금할만도 했습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주목함
그 제자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이 제자가 큰 건물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토록 보이는 것에 약합니다. 어쩌면 질문한 제자는 이 건물로도 나름 괜찮지 않습니까? 다시 지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으로 여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예상과 전혀 다르게 답하십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께서는 그 큰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마가는 특별한 어구를 앞에 이미 써 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1절)"라는 어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성전에 거하시지 않으시고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겔 10:18). 그렇게 떠나간 여호와의 영광은 나중에 새로운 성전에 다시 임하셨습니다(겔 43:4-5). 이전 성전은 폐지되고 회복된 새 성전에 임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완전히 무너지리라는 말씀은 이런 맥락 안에 있는 말씀입니다.
새 성전을 일으키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성전을 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14:58). 예수님께서 숨지실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15:38). 이것은 성전이 폐지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성전을 일으키는 사건입니다(14:58). 우리는 이제 어떤 건물로 가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새성전이신 것입니다. 무화가나무가 말라서 사람이 영원히 거기에서 열매를 거두지 못하게 된 것처럼 당시 성전은 철저하게 무너져서 이제 아무도 그곳을 통과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예상을 벗어납니다. 성전이 더욱 영광스럽게 될 것을 예상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답을 듣고 종말을 떠올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 조용히 물었습니다(3절).
성전을 마주 대하여 좌정하심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3절에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신 예수님께서 바로 새 성전이십니다. 옛 성전과 제도는 폐지될 것입니다. 그 폐지될 성전을 새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마주 대하여 좌정하신 것이니다. 마치 성전을 심판하는 심판주처럼 그렇게 앉으신 것입니다.
종말의 때
제자들은 때와 징조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물은 때는 종말의 때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것과 종말을 연결시켜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초림부터 종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세상 끝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때로부터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징조
징조는 원어로 표적(σημεῖον)입니다.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은 종말이 온 것을 알 수 있는 신호라는 뜻입니다. 즉 종말에 일어날 일인데 그것을 보고 종말인지 알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주의할 것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이르렀을 때 주의할 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해 주셨습니다. 징조를 보고 종말의 때를 가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종말의 때에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참칭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6절). 예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제 2 위격이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때에 우리가 확고하게 붙잡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6절에 나오는 "내가 그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말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이런 뜻입니다. 이 말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군데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종말의 때에는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참칭한다고 합니다. 그런 일들이 각종 이단과 사이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특징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는 스스로를 예수님, 혹은 성령님이라고 칭합니다. 정통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한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도 당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는 논리를 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로 그들이 이단이요 사이비인 것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시 초림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권능으로 오십니다. 그 누구도 그 앞에서 고개를 들고 반역할 수 없는 온전히 드러난 권능과 영광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으로 오시는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썩는 몸, 약한 몸, 욕된 몸, 육의 몸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예수, 또는 성령이라고 하면서 기성 교회가 자기를 핍박한다고 하는 것은 곧 자기가 이단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성도들은 이것을 잘 분별해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미혹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말의 시작, 재난의 시작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징조로 난리와 난리 소문이 들릴 것이라고 하십니다(7절 상). 난리와 난리 소문이 들릴 것이지만 성도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난리와 난리 소문은 끝이 아니고 재난의 시작입니다(7절 하, 8절 하).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는 전쟁,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전쟁이 있을 것이고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재난의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8절). 역사를 관찰해 보면 인류가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살았던 날들은 극히 적습니다. 항상 전쟁과 지진과 기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박해와 복음전파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종말의 때에는 박해와 복음 전파의 시대입니다(9-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곧바로 영광스러운 시대로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공회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합니다(9절). 또한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게 됩니다(9절 하). 재판을 받기 위해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판은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해서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25장).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면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도 예상을 뒤집어서 전개됩니다.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만국에 전해지는 복음
예상을 뒤집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박해를 받으면서 전해지는데 빠르게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만국에 전해질 것입니다(10절). 복음이 만국에 전해지는 그 첫 시작이 바로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박해인 것입니다.
박해를 받을 때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이 박해를 받을 때, 즉 사람들이 믿는 자들을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오히려 성령께서 그들과 더욱 친밀하게 거하십니다. 얼마나 친밀하게 거하시는지 증언할 말을 입에 넣어주신다고 하십니다(11절).
박해로 더 능력있게 전해지는 복음
우리 얕은 지혜로 생각할 때 믿는 자들이 높아져서 복음을 전하면 복음이 더 잘 전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보다 훨씬 깊으십니다. 여기에서도 뒤집어집니다. 낮은 곳에서 박해 받는 자리에서 전하는 복음(12-13절)이 더 능력있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이 전해지면서 심판도 함께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땅에 속한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은 그것을 간직한 채로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 자체가 열매입니다. 복음을 간직하고 인내하는 자신을 보면서 거기에서 또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연단입니다.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함
이 말씀은 두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을 반드시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7절)"라는 말씀입니다. 박해를 받고 재판 자리에 서고 매를 맞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실제로 죽는데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두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와 친밀하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11절). 성령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견디도록 하십니다. 혹시 배교하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을 미리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잡으시고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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