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신명기 23장 1-18절 | 여호와의 총회와 전쟁에서 진영의 거룩, 노예제도와 헌상에 관하여

2024. 4. 7. 10:50성서유니온 매일성경/신명기

목차


    신명기 23:1-18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제 7계명과 연관됨

    신명기 22장에서 26장은 언약 조항의 마지막 단원입니다. 22장 1-12절은 제 6계명과 7계명의 연결 부분입니다. 22장 13절부터 23장 19절은 제 7계명과 연관됩니다.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입니다. 

    여호와의 총회

    1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6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8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1절에서 8절은 누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는가를 다룹니다. 이 말씀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결혼 관계가 된 것과 같습니다. 사랑으로 언약을 맺은 관계가 된 것입니다. 사랑에서 자유는 중요합니다. 사랑의 대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총회에 들어올 사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친히 선택하셔서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 관계를 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이라고 정죄합니다. 

    생식기관이 불완전한 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 먼저 나옵니다. 첫째로 생식기관이 불완전한 자는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1절). 사고로 상한 것이든 의도적으로 자른 것이든 생식기관이 불완전하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레위기 22장 24절에 보면 생식기가 상한 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것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생식기관이 상한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56장 3절에서 5절을 보면 고자가 스스로 나는 마른 나무라고 말하면서 절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고자가 여호와의 총회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생명 활동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명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끝까지 배제될까요? 아닙니다. 

    그런 자도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활동에 참여할 수 있음

    이사야서 같은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잡는 고자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이 없는 그들에게 아들이나 딸보다 더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또한 영원한 이름을 주어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총회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약속은 사도 바울에게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으로 디모데를 낳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활동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자고 대대에 기려지고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8장 26-40절에 보면 고자이자 이방인인 에디오피아 내시가 등장합니다.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중요한 회심자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이 제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기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총회가 확장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방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생자

    둘째로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사생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맘제르(מַמְזֵר)는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나 불법적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스가랴 9장 6절에 보면 같은 단어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혼혈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생자는 이방인과 히브리인의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까지 포함합니다. 사생자로 태어난 사람들은 그 세대가 열 번을 아래로 내려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2절). 그러나 이 규정도 예외가 존재합니다. 사사 입다가 사생자였던 것입니다. 사생자인 입다는 사생자라는 것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사로서 암몬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직임을 완수했습니다. 입다의 이름 뜻은 "그가 여실 것이다, 그가 나타나실 것이다"입니다. 이 이름은 앞으로 오실 참된 구원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입다처럼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배척을 사용하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

    셋째로 암몬 사람과 모압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영원히 들어오지 못한다고 규정합니다(3절). 왜냐하면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 그들을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4절, 2:26-30). 또한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4절, 민 22-24장). 모압 족속은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서 여호와의 총회인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4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입에서 저주의 말을 막으시고 축복의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5절).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주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저주를 변화시키셔서 무한한 은혜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였던 우리를 

    모압은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들에게는 평안함과 형통함을 구하면 안 됩니다(6절). 대적자의 형통은 하나님 나라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말렉 족속이었던 하만이 모든 유대인을 다 죽이려고 했던 일이 그 예입니다. 그러면 모압 족속은 영원히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할까요? 아닙니다.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있습니다. 그는 다윗 족보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립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선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들어왔습니다(룻 2:12). 룻이 나오미에게 베푼 선은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내리려고 시도했던 저주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전에 능하십니다. 메시아가 오는 길에 대가 끊길 위험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이방 여인이 등장하여 그가 오실 길을 예비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그 여인들 안에 들어갑니다. 후에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이방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는 역전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7-8절). 에돔은 이스라엘의 형제입니다. 야곱의 형인 것입니다. 애굽은 나그네였던 이스라엘을 환대하여 받아주었습니다. 가나안 온 지경에 양식이 떨어졌을 때 애굽은 야곱의 식구들을 영접해서 그 땅에서 안전하게 살도록 했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축복해야 합니다. 교회가 바로 세워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에 마음을 써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을 받을 길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의 특징

    여호와의 총회에 관한 언약 조항은 여호와의 총회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생명 활동이 넘치는 공동체입니다. 성결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없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환대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1-3).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엡 2:12-13, 19). 할렐루야! 

    진영을 거룩하게 하라

    9   네가 적군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지니
    10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영 밖으로 나가고 진영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11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
    12   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13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14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9-14절에는 진영을 거룩하게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제 7계명과 어떻게 연관될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의식을 갖고 거룩하게 살 것을 교훈합니다. 악과 싸울 때 그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등한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한결같은 사랑과 성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제 7계명은 모든 면에서 순결을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순결은 영적 전쟁에서 가장 큰 힘과 무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한 사람을 들어 쓰시기 때문입니다(딤후 2:21). 

    종횡무진하시는 하나님

    적군을 치러 갈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를 점검하는 것도 아니고 전투 기술을 익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는 것입니다(9절).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진영 가운데에서 함께 종횡무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4절). 14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네 하나님이 너를 구해 내고 네 대적들을 네 앞에서 넘겨주시기 위해 네 진영 가운데 종횡무진하실 것이며 그래서 네 진은 거룩하게 되어야 할 것이며 그가 네 안에서 불결한 것을 보지 않으셔야 하며 그래서 너를 떠나시지 않게 해야 한다" 이 말씀에는 전쟁의 상황이 잘 드러납니다. 전쟁은 정신없이 돌아갑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전쟁터에서 하나님께서 종횡무진 하시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일하신다면 그 전쟁은 이긴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전쟁은 이미 패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영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것과 함께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는 몽설이 나오고 13절에서는 배설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부정합니다. 서로 밀집되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것들이 진을 더럽히게 두면 안 됩니다.

     

    진영의 거룩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7:16, 20).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과 동료들을 역겹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억제하고 멀리 나가서 땅 속에 파 묻어야 합니다(11, 13절). 하나님과 동행하고 이웃과 동행하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삶은 영적 전쟁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병사로서 우리 속에서 나오는 역겨운 배설물(막 7:20-23)들을 잘 처리함으로 이 전쟁에서 하나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습니다. 

    노예가 도망하거든

    15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16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15-16절은 주변 나라의 노예법과 정반대됩니다. 주변 나라들은 도망친 노예에게 극형을 선고했습니다. 도망친 노예를 숨겨준 사람은 누구든지 중한 벌을 받았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15-20에 의하면 노예를 숨겨준 것이 발각되면 사형이 내려졌습니다. 성경은 그런 주변 나라의 법과 반대됩니다. 노예를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라고 합니다(15절). 어떻게 이렇게 명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에 이스라엘에서 노예들이 숱하게 도망갔더라면 이 법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법이 말이 되려면 이스라엘에서의 노예 생활이 그렇게 힘들지 않아야 합니다. 15장 16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노예는 주인을 영원히 섬기겠다고 자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서는 따로 나가서 자유인으로 살면서 세상 풍파를 견디는 것보다 좋은 주인 아래에서 노예로 있는 것이 훨씬 나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엘리에셀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그처럼 대부분의 주인들이 넉넉하고 선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5-16절의 언약 조항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노예의 권리 보장

    그런데 그 중에서도 몇몇 주인은 잔인했을 것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서슴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려주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 명령은 정의로운 명령입니다. 성경은 노예제도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노예의 권리를 크게 보장합니다. 약자의 살 권리가 강자의 경제적 권리보다 우선합니다. 욥기 31장 15절은 노예가 주인과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말씀합니다. 

     

    16절에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가리키실 때 "택한 곳(신 12:5, 11, 21; 14:23-24; 16:2, 16, 11; 20:15; 26:2)"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과 "택하는 대로"가 같은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노예에게 자유를 보장하시는데 하나님께서 행사하신 것과 같은 자유를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권리보장입니다. 

    헌상에 대하여

    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창기와 남창은 이방신의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는 이방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가 포함되었습니다. 이 제의는 다산을 목적으로 하는 제의였기 때문에 이런 행위가 포함된 것입니다. 창기와 남창은 이런 일에 자기 몸을 쓰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지되는 일입니다. 18절에서는 남성 매춘부에게 "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들을 경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창녀와 남창과 그들의 예물은 다 주님께 가증스럽습니다(18절 하). 

     

    하나님께서는 돈의 액수나 어떤 제물의 귀함으로 헌물을 판단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연결된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함께 받으십니다(마 23:23). 마가복음 12장 41-44절에 보면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은 과부를 주님께서 칭찬하십니다. 비록 아주 작은 예물이지만 그것을 드리는 과부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돈의 출처를 따지지 않습니다. 많이 받으면 좋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축복을 기원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행태입니다. 하나님께 헌상해서 드릴 때에는 돈을 통해서 그 사람이 올려진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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