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열왕기하 13장 14-25절 |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는 엘리사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2024. 9. 26. 15:52성서유니온 매일성경/열왕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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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열왕기하 13:14-25

    찬송가 330장 어둔 밤 쉬 되리니


    엘리사

    열왕기하 13장에는 북이스라엘 왕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 기록은 북이스라엘 왕가에서 예후의 집에 속한 왕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후의 아들은 여호아하스이고 그 손자, 그러니까 여호아하스의 아들은 요아스였습니다. 예후를 포함해서 그들은 모두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후 때부터 아람의 침략을 계속 받으면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13:3). 여호아하스는 심하게 학대 당하면서 여호와께 간구했고 여호와께서는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13:4-5). 그 구원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그런데 14절 이하에 보면 "그 구원자가 엘리사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엘리사(אֱלִישָׁע)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구원이시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신약으로 이어져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4절 이하에는 엘리사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15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소서 하는지라 활과 화살들을 그에게 가져오매
    16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하매 그가 손으로 잡으니 엘리사가 자기 손을 왕의 손 위에 얹고
    17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18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20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엘리사는 죽을 병에 들었습니다(14절). 그러자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엘리사에게로 내려와서 문병을 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요아스는 엘리사를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아합 집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처럼 행하고(3:13) 적대했지만(6:31-32) 예후의 집에 속한 요아스와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그 어떤 군대도 거느리고 있지 않았지만 그 어떤 군대보다 이스라엘에게는 든든한 방패와도 같았습니다(6:8-10).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그런 엘리사가 죽는다고 하니 요아스는 굉장한 상실감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요아스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하고서는 활을 잡으라고 하고 자기 손을 왕의 손 위에 얹었습니다(15-16절). 이것은 요아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요아스가 활을 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 대적을 멸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17절에 나온 아벡은 예전에 아합이 아람을 격퇴한 장소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았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했었습니다(왕상 20:26-27). 그랬는데도 이스라엘은 아람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왕상 20:28-30). 여기 나오는 아벡은 그 승리를 생각나게 하는 장소입니다. 엘리사는 그 똑같은 장소에서 아람에게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말은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겠지만 하나님께서 아람을 이스라엘에게 넘기시겠다는 뜻입니다. 

     

    아벡

    죄와의 싸움에서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동쪽 창을 열고 활을 쏘라고 했습니다. 요아스는 그대로 행했고 엘리사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요아스가 화살을 쏜 것은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라고 했습니다. 요아스가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17절). 이 말씀을 들은 요아스는 마음이 뜨거워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마음이 뜨겁지 않았다는 것은 엘리사가 그에게 화살들로 땅을 치라고 할 때 세 번만 친 것으로 나타납니다(18절). 엘리사는 요아스가 단 세 번만 땅을 친 것에 대해서 노하면서 대여섯 번을 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꾸중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요아스가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 번만 쳤기 때문에 요아스는 아람을 세 번만 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며 교훈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609쪽). 

    이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무진장으로 약속해 주신 은혜를 계속적으로 받기 위하여 끝까지 힘써야 된다는 것이다. 약속과 은혜는 신자들로 하여금 게으른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전(靈戰)에 있어서 마귀로 더불어 계속 싸워야 한다. 우리가 전투를 멈춘다고 해서 마귀도 멈추는 것은 아니다. 마귀는 쉬지 않고 활동한다(참조. 벧전 5:8-9).

     

    박윤선 목사님은 아람을 우리를 괴롭히는 마귀로 보았습니다. 이것을 확장해서 우리는 이것을 죄와 사망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마귀의 세력과의 싸움이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 싸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멸절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살아나서 나를 집어 삼키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평안할 때에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서 둔감해지기 때문입니다. 칠 수 있을 때 치고 멸할 수 있을 때 멸해야 합니다.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죽을 병에 걸린 것처럼

    엘리사는 죽을 병으로 죽었습니다(14절, 20절).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놀라운 기적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연약해져 있을 수 있을까요?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607쪽).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의 말씀이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 자신은 질병에 걸려 연약한 상태에 있었던가? 이것은 의문스러운 듯하다. 그뿐 아니라 그의 뼈가 남의 시체를 살리는데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체는 부활하지 못하고 무덤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가? 이것도 의문스러운 듯하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의문되는 듯한 일들은 사실상 문제될 것 없으니 이것은 다만 하나님이 그 종들을 사용하시는 원리를 보여준다. 곧, 하나님의 능력은 그 종들의 약한 처지에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엘리사가 자기 자신의 질병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적합한 바탕이 된 것이다. 

    고후 12:9에 말하기를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니라"라고 하였고, 또 고후 12:10에는 말하기를, "내가 약할 그떼에 곧 강함이니라"라고 하였다. 병으로 앓는 목사도 다른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말 나는 남만 못하다고 생각하며 적은 일에 충성해 보려는 마음으로 안정된 일꾼, 혹 얼울함과 수모를 당할지라도 그 처지에서 겸손히 살아가는 일꾼에게 하나님은 함께하여 주신다(참조. 고전 1:27-29).

    그러면 "약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내로라'하는 의식이 없어진 처세를 하는 것이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에게 무슨 다른 생각이 있으랴? 하나님의 종들은 마땅히 죽을 병으로 앓는 사람처럼 낮아져야 한다. 

     

    박윤선 목사님의 이 말씀은 "자기 부인"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내로라"하는 의식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 알아?" 이런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매사를 "나"라는 자의식이 주관하고 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는 없고 오직 사명만이 있는 것입니다. 사명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길입니다. 

    신자에게 죽음이란

    엘리사의 뼈에 시체가 닿았을 때, 죽어 시체가 되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회생한 것입니다(21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609쪽). 

    엘리사의 뼈에 의하여 이루어진 기적에서 배울 것(20-21절). 그때 사람들이 어떤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 안에 던지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다시 살아났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뼈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하신 기적적 사건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엘리사의 뼈와 관련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기쁘게 사용하셨다는 증표이다. 엘리사는 죽었으나 그의 해골까지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증거하는데 사용되었으니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이것은 그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곧, 하나님께서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먼저 죽은 자의 뼈에 닿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음이 어떻게 생명을 낳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적으로 놀라운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바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죽었을 때 그가 비록 뼈만 남았다 할지라도 그 뼈가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이것은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주장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 놀라운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자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마 27:50, 52). 그러므로 신자는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세상 모든 사람의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신자는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로 들어갑니다. 이처럼 믿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22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2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24   아람의 왕 하사엘이 죽고 그의 아들 벤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매
    25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앞에 엘리사가 예언한 대로 요아스는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았습니다(25절). 그는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습니다(25절 하). 이것은 정확하게 엘리사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18-19절).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23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멸하지 않으시고 당신님 앞에서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23절 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언약 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지 않으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긍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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