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열왕기하 4장 18-37절 | 문제 해결보다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

2024. 9. 8. 11:04성서유니온 매일성경/열왕기하

목차


    열왕기하 4:18-37

    찬송가 309장 목마른 내 영혼


    경사가 있은 후에 

    엘리사가 행한 기적이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4:16). 그 말씀대로 수넴 여인은 아들을 낳았습니다(4:17).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덕분에 그 가정에 큰 경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아이의 죽음과 수넴 여인의 행동

    18   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19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20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21   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22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23   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25   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는데 죽었습니다. 머리에 통증을 호소하고 죽은 것입니다(19-20절). 수넴 여인은 그 길로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는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서(21절) 엘리사에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엘리사를 데려오려고 한 것입니다. 엘리사가 오면 아이가 살아날 줄로 믿은 것입니다. 

    평안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급하게 가는 것을 본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23절). 그에 대해서 여인은 "평안을 비나이다(שָׁלֽוֹם)"라고 하였습니다(23절). 이 말은 큰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샬롬, 즉 모든 일이 잘 돌아가고 있고 별 일 아니니 걱정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아이가 죽었는데 여인은 평안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것이 이 여인의 신앙이라고 주석합니다. "이 말은 그 여인의 신앙을 보여준다. 그는 죽은 아이가 살게 될 것을 믿고 안심하였다. 그는 게하시가 문안할 때에도 평안하다라고 대답하였다(26절 하)" 

     

    우리 믿는 사람은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는 날 우리는 다 부활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샬롬으로 인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수넴 여인은 사환에게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라고 명합니다(24절). 사환이 여주인을 배려해서 천천히 가거나 중간에 쉬려고 멈추거나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 집안의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그 집안에는 항상 배려심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미리 아시는 우리 주님

    여인은 엘리사가 있는 갈멜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 여인이 도착하기 전에 엘리사는 멀리서 그가 오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25절). 우리 주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앞서서 아십니다. 아시고 먼저 좋은 것을 준비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토록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평안하냐

    26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엘리사는 게하시를 먼저 보내서 여인에게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라고 물어보게 합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평안을 물어본 것은 여인의 행동이 평상시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는가 자세하게 물어보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여인은 "평안하다"라고 짧게 대답합니다. 

     

    실제로는 아이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평안하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엘리사에게 직접 아뢰고 답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그가 정말 평안할 것임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안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이 여인의 믿음이 참 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말씀은 이미 신앙의 선배들이 삶으로 보여준 말씀입니다. 

    직접 아뢰는 것의 유익

    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았습니다. 이것을 본 게하시는 그를 물리치고자 했습니다. 무례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엘리사는 그를 가만 두라고 합니다.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호와께서 엘리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에게 직접 들으라는 뜻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괴로움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 아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는 잘못을 범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다 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영혼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직접 토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 예수님께 나아가서 우리 마음을 쏟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여인의 문제를 가르쳐주시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여인이 엘리사의 발을 안은 것에 대해서 "생명이 약동하는 믿음은 어떤 때에는 형식에 매인 위신(威信)을 문제시하지 않는다"라고 주석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이런 저런 형식을 따지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을 찾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 그대로 나악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28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

     

    여인은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인은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습니다. 여인은 아이가 살아날 줄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슬픔을 토로합니다(28절).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빼앗아가시는 것은 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지 않으냐라는 뜻입니다. 여인이 믿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이유가 있으실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여인은 엘리사를 붙들고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이유는 뒤에 나옵니다. 바로 그 여인의 모든 소유를 다시 되찾는데 이 일이 놀랍게 사용되는 것입니다(왕하 8:6).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하나님의 그러한 깊으신 섭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문제의 핵심을 붙드는 여인

    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30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기의 지팡이를 들려서 먼저 보냅니다. 엘리사는 이 일이 시급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게하시가 엘리사의 지팡이를 그 얼굴에 놓았을 때 그 병이 나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그래서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게하시를 따라가지 않았습니다(30절). 게하시가 가서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소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행동입니다. 만약 인간적인 사랑이 믿음보다 앞섰다면 여인은 급하게 게하시를 따라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이 말이 아이가 살아날 수 있다는 실낱과도 같은 소망에 불을 붙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아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여인은 게하시를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게하시를 따라가지 않고 여전히 엘리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 문제의 근원과 해결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날 때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여인은 핵심을 붙들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기도하는 엘리사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엘리사는 "여호와께 기도"합니다(33절). 이 기도는 이 아이를 살리는 능력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선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열심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항상 우리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열심을 구하며 기도합니다. 기도는 이렇게 나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도와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산 제사가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전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도

    엘리사가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를 살리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하)" 예수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제2위격으로 당신님의 능력으로 충분히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철저하게 낮아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할까요? 

    교역자가 가져야 하는 태도

    엘리사는 아이 위에 올라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두 번 했습니다(34-35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59쪽). 

    이와 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1)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의 속에 느껴지고 있었다는 것.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는 누구나 그 인격의 내부에서 생명과 평강과 힘에 접촉된다. 2) 엘리사는 이 생명과 평강과 힘을 그 죽은 아이에게 전할 의욕을 가짐. 그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려 "입에 입, 논에 눈, 손에 손"을 댄것은 그만큼 그 아이와 가까이 연합하려는 열원(熱願)의 표시였다. 영력의 전달이 이런 접촉에 의존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를 긍휼히 여기는 엘리사의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뜨거운 곳에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도 나타난다(복음 사역에 있어서 교역자가 엘리사처럼 육체적 동작을 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와 연합해 계시는 예수님

    구약의 많은 구절이 영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육체적으로 적용하면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부자였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다 부자여야 한다고 적용할 수 없습니다. 족장들의 부함은 우리에게 쌓여있는 하늘의 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이러한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이 행동은 엘리사가 그 아이와 가까이 연합해서 자기의 생명을 아이에게 전달하려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얼마나 가깝게 연합되어 계시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의 입이 예수님의 입이요, 우리의 눈이 예수님의 눈이며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정말 적절하게 주석하셨듯이 복음사역에 있어서 교역자는 성도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와 같은 육체적 동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잘못입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