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0. 14:45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열왕기하
목차
열왕기하 5:1-14
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하나님의 돌보심
수넴 여인은 하나님을 존중함으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을 붙듦으로 그 아들이 다시 살았습니다(4:8-37). 그 사건 덕분에 나중에 소유도 되찾았습니다(8:1-6). 기근이 그 땅에 임하고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에 엘리사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4:38-4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사용하셔서 그들에게 돌보심을 계속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방을 향한 은혜와 친 백성을 향한 은혜의 차이점
그런데 그 돌보심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이방나라를 향한 섭리가 다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주석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60-561쪽).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만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다른 나라들도 그리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는 천지와 세계와 만국의 대주재(大主宰)이시다. "나아만"도 여호와의 은혜로 전쟁에 승리하여 아람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그때에 세상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이 그의 택하신 나라(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것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 은총 면에서 하나님이 그 나라들에도 섭리적으로 역사하셨는데 그것은, 1)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 목적(롬 1:20)과 2)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목적(마 5:43-48)과 3) 그들을 내버려두심(롬 1:28)과 4) 그들을 심판하시려는 목적(창 15:13-16)으로 하신다.
그러나 그가 그 택한 백성에게 대하여는 1)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여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간섭하신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이 여호와를 믿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할 때에는, 그가 그들을 꾸짖거나 혹은 그들로 실패하게 하셨다(참조. 왕상 22:1-36; 대하 16:7).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나 유다 나라의 흥망성쇠의 원리가 이 세상 나라들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방면을 지니고 있다. 2) 그들의 믿음을 연단하여 죄를 이기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간섭하신다(참조. 히 11장; 약 1:12; 벧전 1:7).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과 목적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그것과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과 믿는 우리에게는 심판하시려는 목적을 갖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은 심판이 아니고 깨달아서 주님께 돌이키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연단하고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순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도 주관하십니다.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것은 "여호와께서 ...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 때문입니다. 그가 큰 용사인 것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사로 만드셔서 사용하신 결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을 주관하십니다.
나아만은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였습니다. 그가 나병환자인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행을 가장한 복이었습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61쪽). 불행이 다가와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 구원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찾아온 그 불행은 불행을 가장한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불행이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을 얻도록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얻은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 그 분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지극한 복을 누리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소녀는 약했습니다.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종의 역할도 충실하게 잘 감당했습니다. 그가 종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는 것은 그가 자기 주인의 나병이 낫기를 바랐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2-3절).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든지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무리 약한 처지라도 하나님의 은총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부족한 것을 채웁니다. 그러면서 구원역사를 이룹니다.
복음의 전달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이 소녀의 말은 나아만에게 들렸습니다(4절). 그리고 아람 왕에까지 들렸습니다(5절). 박윤선 목사님은 "복음도 이렇게 미천한 자들로 말미암아 강하고 높은 자들에게 전달된다(참조. 고전 1:27-28)"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61쪽)"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고후 6:1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미천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이고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람 앞에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삽니다. 복음 전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해야 합니다(벧전 3:15).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의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였습니다(5-6절). 아람 왕은 이렇게 나아만을 신뢰하고 귀하게 여겼습니다(1절).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떠날 때 그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습니다(5절 하). 이것은 굉장히 큰 제물입니다. 은 십 달란트는 지금으로 하면 노동자의 약 165년 노동의 가치라고 합니다. 금 육천 개에서 "개"를 세겔로 본다면 이것은 노동자가 약 980년 일한 노동의 가치라고 합니다. 거기에 귀한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으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제물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연봉을 대략 5,000만 원이라고 한다면 이 제물은 약 500억 원 정도의 제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의 불신앙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의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간 작은 소녀도 아는 것을 이스라엘의 왕은 몰랐습니다. 이처럼 권력자의 신앙이 백성들의 신앙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권력자가 백성을 타락시키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말에서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이 말은 하나님을 높이는 말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대신 전쟁을 두려워하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엘리사는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라고 왕에게 전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의 주된 통치자는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왕기의 주인공은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열왕기는 선지서 안에 들어갑니다. 즉 열왕기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책인 것입니다.
엘리사가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이방인에게 알리는 증거 운동이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61쪽).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사용하셔서 아람 나라에 하나님을 알리시고 나아만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아만은 하나님께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박대 당한 나아만과 사람의 큰 병폐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나아만은 말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보기에 참 두렵고 큰 행렬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를 직접 만나지 않고 다만 사자를 보내서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찾아왔을 때에 엘리사가 그를 직접 만나주지 않고 "사자"를 내보내어 간접으로 그의 할 일을 지시한 것은, 그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피함이 아니었다. 그의 목적한 바는 문둥병 치료가 사람의 접촉(11절)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나아만이 낫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낫게 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런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가 분노한 것은 나를 어찌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이렇게 박한 대접은 처음 받아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큰 병폐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를 위해서 뭔가 마음을 쓰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절). 이것이 사람의 교만입니다. 사람은 다 나병환자와 같습니다. 죄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압니다.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죽음의 문제보다 당장 자기가 어떻게 대접을 받느냐를 더 중요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과 명예와 권력에 마음을 씁니다. 그것들이 있으면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고 잘 대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는지는 2차적인 문제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나병으로, 즉 죄로 인해서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사람이 앓고 있는 참으로 괴악한 병입니다.
나아만은 다메섹의 강들이 이스라엘의 강물보다 낫지 않느냐고 하면서 분노하여 떠나려고 했습니다(12절). "아바나"는 현재의 바라다(Barada)란 강인데 물이 깨끗하고 맑다고 합니다. 또한 "바르발"은 다메섹 남쪽으로 흘러서 헤이야니(Heijany) 호수로 들어가는 강입니다(박윤선,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주석, 562쪽). 이 강들은 겉으로 보기에 정말 요단강 보다 낫게 보였습니다. 나아만은 여기에 나라의 자존심을 가져도 붙였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나라나 민족을 초월합니다. 교회는 그 어떤 나라나 민족보다 위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가장 위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만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온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주적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민족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높이 있습니다. 거기에 민족주의나 자국 중심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전에 복음을 가리켜서 서양 사상이라고 하여 배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태도가 딱 그런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분노하여 돌아가려는 나아만에게 그의 종들이 나와서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라고 말하며 그의 마음을 일깨웠습니다(13절). 이 말은 참 지혜로운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나아만의 종들의 이 말은 신약적 구원의 진리도 보여준다. 곧,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서 크고 어려운 일이라도 행해야 할 처지인데, 그것이 면제되고 다만 믿어 순종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야 우리로서 못할 것이 무엇인가? 구원을 성립시키는 그 큰 고난은 주님께서 다 받으셨으니 우리는 다만 주님을 믿을 뿐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참조. 롬 10:6-10).
구원이 쉽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일을 면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마땅히 하나님의 무한 진노를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 무한하신 진노를 다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면에서 구원이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또한 한없이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셔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반응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의 종들의 입에 지혜로운 말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14절)"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 덕분입니다.
일곱 번
그는 요단 강에 몸을 잠기게 했는데 일곱 번을 그렇게 했습니다(14절). 여기서 일곱 번은 하나의 주기를 나타내는 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는 날을 가리키는 수입니다. 또한 이방인과 연관된 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무리를 먹이실 때 떡은 일곱 개였습니다(막 15:34). 또한 헬라파 유대인으로 구성된 집사의 수도 일곱입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은 신약에 나오는 이방 구원의 모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아만과 사렙다 과부를 들어서 이방인의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눅 4:26-27).
나아만이 일곱 번을 채우자 그의 살은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병에서 놓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립니다. 영생을 누리면서 우리의 일생, 즉 일곱이라는 수가 가리키는 일생이 끝나고 요단강을 건너는 날, 즉 죽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하게 성화시키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나아만이 경험한 기적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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