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26장 1-15절 | 우주적 심판 이후에 나오는 성전과 예루살렘 성에 대한 심판

2024. 7. 1. 22:1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26:1-15

    찬송가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전 세계에 대한 심판과 성전에 대한 심판

    예레미야 25장에서는 전세계적인 심판을 말씀했습니다(25:15). 그 심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술잔으로 비유되었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는 25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목자들을 향해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25:34-38). 여기서 목자들은 나라의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지도자들의 책임은 지도를 받는 사람들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젊은 사자가 굴에서 나와서 포효하며 짐승을 사냥하는 것처럼 나라들의 지도자들과 그 나라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으실 것입니다. 이 예언은 여호야김 넷째 해에 예레미야에게 임한 예언이었습니다(25:1). 오늘 본문에는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 나옵니다(1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심판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 대한 심판입니다. 나중에 복음서에 보면 이 두 가지 심판, 즉 우주적 심판과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 대한 심판은 함께 묶여 있습니다. 

    성전 뜰에 서서

    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1절). 경고하신 이유는 그 경고를 듣고 들은 사람들이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3절). 악한 길에서 완전히 떠나서 돌아오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4쪽). 악행에서 돌이켜야 하는 이유는 악행이 계속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선포할 장소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 장소는 성전 뜰입니다. 성전 뜰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은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입니다.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한 마디도 감하지 말아야 했습니다(2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4쪽).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자의대로 가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참조. 신 4:2). "한 마디도 가감하지 말라"(אַל־תִּגְרַ֖ע דָּבָֽר). 이 말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한 말도 빼놓지 말라"는 의미이다. 예레미야가 전할 말씀은 유다 민족이 회개치 않으면 멸망한다는 무서운 예언이니,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의 감정이 상하기 쉬운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하다가, 혹 하나님의 말씀을 감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말도 빼놓지 말라"고 부탁하셨다. 강퍅한 자들에게는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그들에게 대하여 사정없이 할 말을 해야 한다. 

     

    박윤선 목사님이 사정없이 할 말을 해야 한다고 하는 대상은 악행을 계속하는 강퍅한 자들입니다. 일반청중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자기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에서 이런 청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박윤선 목사님은 3절에 "혹시"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4쪽). 

     

    "혹시"(אוּלַ֣י/울라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개 여부에 대하여 내다보시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회개치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그들의 회개를 원하시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그의 자비의 표현이다. 

    각각

    또한 혹시 다음에 나오는 "각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4쪽). 

     

    여기 "각각"(אִ֖ישׁ/이쉬)이란 말은 회개 운동에 있어서 단체적 회개보다 각 개인의 개별적 회개가 절대 필요함을 고조한다. 이와 같은 말씀은 슥 12:12-14에도 보여 주었으니, 거기 거듭거듭 나오는 "따로"라는 말이 이 점을 알려준다.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5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4-5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곳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전적으로 완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사람 수준으로 낮추었습니다. 사람이 지킬 수 있는 세세한 조항으로 만들어서 스스로 그것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에 열심이라고 자부했던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가장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율법을 행한다는 것

    그렇다면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율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쓰여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율법에 쓰여있다고 할 때 가장 현저한 방법은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제물이라는 말 자체에 가까이 가다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어떻게 가까이 가느냐, 제물을 가지고 가까이 간다는 것입니다. 제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중보자를 의지해서 가까이 간다는 의미가 성전 예배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느냐, 그 답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성전 뜰에서 선포되었다는 것과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선포되었다(2절)는 것에 이런 의미가 다 담겨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심판

    6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이어지는 말씀은 "성전"에 대한 심판입니다. 왜 성전을 심판하신다고 하실까요? 왜냐하면 당시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왜 있는지, 성전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전혀 유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습관을 따라서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말씀은 성전이 없었던 때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실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성막과 법궤를 모셔 두었던 장소입니다(수 18:1; 삼상 1:3; 4:10-22). 그 때는 성전이 없었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없애시겠다는 뜻입니다. 성전에 심판을 선고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된 당신님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허셨습니다(요 2:19-22). 성전을 허시고, 즉 당신님의 육체를 찢으시고 하나님께 나아갈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성전에 대한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되었습니다. 성전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기능을 성전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대한 심판

    성전에 대한 심판은 예루살렘 성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집니다(6절).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은 재건되었지만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다시 한 번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전에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전해졌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여러 개의 산이 겹쳐 있듯이 미래를 다중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

    백성들의 반응

    7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8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9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7절). 듣고나서 회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정반대의 반응을 합니다. 예레미야를 붙잡고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8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선지자를 대한 방식입니다. 그들은 나중에 예수님도 이렇게 대했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한 까닭은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5쪽). 

    죽이고자 함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1) 그것은, 그들이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로 오해한 까닭이었다. 예루살렘은 영원히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시 132:14), 예레미야는 그때에 멀지 않아서 그 성(예루살렘)이 열국의 저주거리가 되리라고 하였다. 그것이 저희에게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하였다. 예루살렘이 영원히 하나님의 거처가 되리라는 약속은, 유다 민족이 범죄하고 회개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위에 관설된 하나님의 약속이 영적으로는 필경 이루어지고야 만다. 곧, 영적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상에 있어서 땅 위의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의 결과는 저렇게 중대하니, 곧 참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은 근본적 중요성을 가진다.

    2) 그들이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한 이유 중 또 생각할 만한 것은, 그때 유대인들이 하나님보다 성전과 기타 종교 의식을 믿는 그릇된 사상을 가지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지나친 숭배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으면서도, 여호와의 전이 예루살렘에 있는 한, 유다 민족은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7:4). 그런데 예레미야는 저희의 생각과는 달리 예루살렘이 황무하여지리라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발광할 정도로 분노하였다. 이것은 스데반을 죽인 무리의 사고방식과 같다(행 6:10-14). 

     

    박윤선 목사님이 잘 지적했듯이 젊은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잘못 이해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레미야를 향한 재판

    10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1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
    12   예레미야가 모든 고관과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가 들은 바 모든 말로 이 성전과 이 성을 향하여 예언하게 하셨느니라
    13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14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15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

     

    예레미야 사건을 두고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 입구에 유다의 고관들이 앉았습니다(10절). 성전 새 대문 입구는 성전의 동쪽 문 앞을 뜻합니다. 당시 종교는 굉장히 부패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즉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예레미야가 죽는 것이 합당하다고 합니다(11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이들이 재판 자리에 앉아서 참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의 부패성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셨다고 변론합니다(12절). 하나님께서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2절)"라고 하신 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전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선포를 듣고 그들의 길과 행위를 고치고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입니다(13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7쪽).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이때까지 범한 과오를 고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보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함(13절).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대적하는 자들과 모든 유다 민족이 받아 들여야 할 복음이다. 이것은 그들을 해롭게 하는 말씀이 아니고 그들의 안전 보장을 위한 사랑의 말씀인 것이다. 그들이 예레미야가 지적한 죄악(4, 5절)을 범치 않았다면 예레미야의 이 말씀이 광언이었을지 모르나, 그들의 그와 같은 범죄가 확실한 마당에는 그의 이 말씀은 절대적 진리로 받아야 될 것이다.

    복음과 재앙의 말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에는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받고 거부하는 자는 거부함으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내용이 복음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것만 다릅니다. 재앙을 선포하지만 그 내용은 돌이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재앙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어서 하나님께 돌이키면 삽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복음과 동일합니다. 

     

    예레미야는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는 너희가 죽이려거든 죽이라는 뜻으로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라고 합니다(14절).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히 알라고 합니다. 그것은 너희가 만일 나를 죽이면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이고 그에 대한 죄의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무죄한 까닭은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15절). 그가 참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의 말을 하라고 보내신 이유는 재앙을 내리기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고난을 받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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