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26장 16-24절 | 장로들의 지혜로운 권면과 보호 받는 예레미야

2024. 7. 2. 17:2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26:16-24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종교지도자들과 생각이 달랐던 백성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았으니 예루살렘 성전을 없이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황폐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26:9). 그 말을 들은 종교지도자들, 곧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예레미야가 죽는 것이 합당하다고 정죄했습니다(26:11). 그러나 고관들과 백성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16절). 

     

    16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

     

    종교지도자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데 오히려 일반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변호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7쪽).

     

    종교가들이 부패하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악한 자들이 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룩한 종교를 악하게 이용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종들을 박해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죽이기에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 중에는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눅 24:18-21 참조).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종교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한 이유는 그가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쳐서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교 체제를 기득권 삼아서 살던 사람들에게 이 예언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게 하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기독교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기독교는 이렇게 부패하기 쉽습니다. 교역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자기에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전하는 말씀과 시행하는 성례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면 곧 부패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패한 현상은 다름 아닌 교역자들 스스로의 안위와 기득권을 지키는 쪽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 예수 그리스도 증언이 아니라 교회의 유지와 안녕, 자기들의 자리 보전을 위한 결정을 한다면 예레미야의 선포가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께서 저를 포함해서 모든 교역자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원합니다. 

    교역자들과 성도들

    이 시대에도 종교지도자들이 정죄하고 일반 백성들이 변호하는 현상이 교회 안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성도들은 참된 교역자를 잘 알아봅니다. 하지만 기득권에 매여있는 지도자들은 참된 교역자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에게 이익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된 사람을 편애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압니다. 말을 안 할 뿐입니다. 

    장로들의 발언

    17   그러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8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19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고관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에 대해서 변호하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발언합니다(17절). 여기서 장로(זָקֵן)라는 말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연로한 사람은 경험이 많습니다. 역시 장로들은 역사 가운데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대략 80년 전의 일

    그 일은 히스기야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주전 716년부터 687년까지 29년간 통치했던 왕입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한 때는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해입니다. 그 해는 주전 608년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말한 사건은 8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미가의 예언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18절)" 이 말씀은 미가서 3장 12절에 그대로 나옵니다. 미가서 3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가서에 보면 미가가 이렇게 예언한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했기 때문입니다(미 3:9). 그들은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했습니다(미 3:10). 그들은 재판할 때 뇌물을 받았고 제사장과 선지자는 돈을 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미 3:11)"라고 자긍했습니다. 이것도 예레미야가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치면서 예언한 이유 안에 포함됩니다. 미가서를 그대로 가져와서 연결짓기 때문입니다. 

     

    미가가 예언한 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과 동일합니다.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된다는 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라는 선포와 같습니다. "이 성전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성전 산이 황폐해져서 다른 산들의 높은 곳과 다를 것이 없다는 뜻으로(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8쪽) 예레미야가 예언한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라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이런 동일한 예언을 들은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 백성들은 미가 선지자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 선언하신 재앙에 대해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19절). 

    장로들의 권면 

    장로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만일 예레미야를 죽이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연로한 자들의 지혜는 이전에 경험한 역사와 경험적으로 축적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에 지혜를 구한다면 연로하신 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알아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교회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알아야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세워질 때에는 이 부분을 더욱 강조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역사를 알고 중요시하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 그 교회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만 가득하면 전에 겪은 시행착오를 다시 겪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특별히 위에서 말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최악의 지도자가 세워졌다면 고통을 더욱 커집니다. 그런 지도자는 장로들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기를 지키는데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19절)"

    죽임 당한 우리야

    20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21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22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23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히스기야는 선한 왕이었찌만 여호야김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 때 미가 선지자는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야라는 선지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23절). 우리야는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인데 그도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예루살렘 성과 그 땅에 경고하여 예언했습니다(20절). 그러자 여호야김 왕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야는 애굽으로 도망갔지만(21절) 여호야김 왕은 애굽에까지 사람을 보내서 우리야를 연행해 왔습니다. 연행해 와서는 우리야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했습니다(22-23절). 평민의 묘지는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묘지입니다. 요시야가 우상을 멸하는 개혁을 단행할 때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평민의 묘지에 뿌린 일이 있습니다(왕하 23:6). 우리야는 이렇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드론 골짜기, 평민의 무덤

    보호 받은 예레미야

    예레미야가 예언을 한 때는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입니다(26:1). 즉 우리야가 죽은 것처럼 예레미야도 죽임 당할 위기 가운데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서 백성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했습니다(24절). 예레미야와 우리야의 운명이 대조되는 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설교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48-349쪽).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모든 일을 배정하심

    <설교> 우리야와 예레미야(20-24절)

    1. "우리야"라는 선지자는 이 부분에만 나오는데 "예레미야"에게 비교하면 매우 작은 사람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무대로 하고 예언했으나 우리야는 그렇게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순교하기까지 충성했으니, 그도 예레미야보다 못하지 않게 하늘에서는 위대해진 것이다. 

    2. 우리야의 당한 일과 예레미야의 당한 일은 서로 대조된다. 우리야는 애굽에까지 도망했었으나 필경 본국으로 끌려 와 순교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당장 죽이려고 분노한 폭도들앞에서도 "아히감"이란 사람의 보호를 받아 죽음을 면하였다. 이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배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대하여,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저렇게 하신다. 혹은 부하고 혹은 가난하며, 혹은 건강하고 혹은 병약하며, 그밖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들의 처지는 다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배정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 각기 서로 다른 처지에 대하여 만족하기를 배울 뿐이고, 그 수수께끼 같은 난제를 다 알려고 할 것은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모든 일이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 우리가 내세에 들어갈 때에만 모든 일이 환해진다(고전 13:12). 

    3. 예레미야가 죽임이 될 위험한 때에, 아히감이라는 사람에게 세력을 주어 예레미야를 건지게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이것도 일종의 이적이다. 이적은 반드시 천사가 직접 나타나거나 번개가 번쩍하는 것같은 놀라운 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이적엔 특수한 것도 있지만 일반적인 것도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그의 섭리에 의해서 되는 일들이다. 이런 일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된다.

    십자가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을 사람은 다 알 수가 없으니 각자의 처지에서 만족하기를 배우고 내세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삶은 배움의 연속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처분에 만족하기를 배우고 내세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이적을 알아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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