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34장 8-22절 | 거짓 회개로 하나님을 업신여긴 결과

2024. 7. 20. 11:09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34:8-22

    찬송가 276장 아버지여 이 죄인을


    거짓 회개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를 보내셨습니다. 보내셔서 그가 평안히 죽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34:5).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을 배반했습니다. 그 때문에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를 잡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왕을 배반한 자는 잡히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비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선포하실 수 있으신 말씀입니다. 또한 시드기야 입장에서는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시드기야는 얼른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정말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 회개였다는 것이 8절 이하에 나옵니다. 

    계약을 맺었다가 무시함

    8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
    12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시드기야 왕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습니다(8절). 이 계약이 하나님 앞에서 맺은 계약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계약이 사람 차원의 계약이 아니고 하나님 차원, 즉 엄숙하기가 그지없는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했습니다(9절). 이것이 계약의 내용입니다. 이 계약대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은 종을 놓아주었습니다(10절). 여기까지 보면 시드기야와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1절 이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거짓 회개

    그렇게 종들은 놓아주어 자유롭게 한 다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서 다시 종으로 삼았습니다(11절).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12절). 시드기야와 백성들이 회개한 것은 거짓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 회개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설교를 남겼습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68-469쪽).

    시드기야의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1. 시드기야가 본래 노예를 해방하기로 언약한 것이 육체적 위험을 면키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외식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양을 취함(노예를 해방하기로 언약함)은 하나님께 아첨하는 죄악이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경건이 아닐 뿐더러 도리어 그를 농락함이다. 

    2. 그때에 유대 사회에 있어서 노예는 가장 불쌍한 자니, 그들을 놓아줌으로 실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된다. 그러나 시드기야가 이런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로 하나님 앞에서 언약했다가 취소했으니, 이는 실상 그들에게 대하여 잔인한 행동이다. 잠 14:31에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라고 하였다. 

    3. 시드기야의 그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죄악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했던 것을 이제 배반했으니,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악이다. 

     

    급박한 상황을 면하기 위해서 하는 회개는 이렇게 위험합니다. 겉으로만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더 큰 죄를 자기 위에 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 나아가서 매일 회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김

    1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
    16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

     

    13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은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13절). 그 언약은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라"라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종에서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니 너희는 서로를 종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2절과 신명기 15장 15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순종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아예 듣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14절 하). 그런 조상들처럼 시드기야와 백성들도 종들을 다시 잡아와서 노비로 삼았습니다(16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69쪽). 

    노예 해방법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놓아주신 사랑에 근거하여 제정하신 것이니만큼,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13절).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예사로이 위반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까지도 이 법을 위반했으니, 후손된 그들이 회개치 않을 때에는 조상들의 죄까지 걸머지게 된다. 애 5:7에 말하기를,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시드기야와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법을 지키겠다고 언약까지 하고 변심했으니, 이것은 주님을 노엽게 하는 죄악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말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업신여길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사랑이 떨어졌다면 하나님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긴 결과

    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18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19   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21   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2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주민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갚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은 전쟁의 재앙을 뜻합니다. 예레미야는 사역 초기부터 전쟁의 재앙에 대해서 거듭 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70쪽).

    (이것은)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출발한 때부터 40여 년 동안 거듭거듭 외치던 말씀이다(참조. 렘 5:17; 6:25; 9:16; 11:12; 12:12; 14:12, 16; 15:2; 16:4; 19:7; 20:4; 21:7, 9; 24:10; 25:29; 32:24, 36). 이 밖에도 같은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가 이런 말씀을 자주자주 한 이유는 1) 이것이 그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2) 그가 이 일에 대하여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예언은 예레미야의 사역 초기에 당장 이루어지지 않고 40년 동안 외친 후에야 이루어졌으니 이것을 보아도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때에 오래 참으면서 끝까지 믿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방아(mills)는 천천히 찧지만 필경은 완전히 가루를 만든다(Laetsch, God's mills grind slowly, but surely and crushingly).

    자유에 관하여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획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자유는 칼과 전염병과 기근의 자유를 초래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고후 3:17). 성령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를 칠 수 있는 칼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엄숙한 언약의 결과

    시드기야와 모든 백성들은 송아지를 둘로 쪼개어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18절). 그들은 엄숙하게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71쪽). 

    "송아지를 둘로 쪼개어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감"은 언약을 신중히 하는 고대의 풍속이다(창 15:10). 그것은 그들이 언약을 파기한느 경우에는 그 쪼갠 송아지처럼 죽게 될 것은 각오해야 하는, 엄숙한 언약인 것이다(Calvin). 그 언약을 파기하는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하기 위하여,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사실에 대하여 우리 본문은 거듭 말하고 있다(18절 상반, 19절 상반). 

     

    두 번이나 거듭 말씀한다는 것은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그만큼 엄숙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숙하게 언약을 맺어놓고 바벨론 왕이 물러가자 그들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서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고 바벨론이 두려워서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더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매우 업신여긴 것입니다. 이 죄는 너무나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들이 언약한 대로 그들이 두 송아지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할 오직 한 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보다 두려워하지만 신자는 반대입니다. 신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두려워합니다. 경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마 10:31). 그러므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언약 지키기에 힘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언약을 맺은 그대로 재앙을 당했습니다. 

    간교한 마음과 죽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이 다시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방이 막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다가도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누리던 혜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간교한 마음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은 죽음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죽음으로부터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자리, 즉 장례식은 가장 좋은 복음 전도의 장이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람이 영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바벨론 왕이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정화시킬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하려는 노력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 길이 있음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평안한 때에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71쪽). 

    시드기야 왕과 그 백성은 노예 해방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군대가 떠났던 틈을 타서 그 언약을 지킬 마음이 해이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다시 보내어 그들을 멸망시키도록 하신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신자들이 평안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에 있어서 환난 때보다 해이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큰 죄라는 것이다. 이런 죄는 너무 간교하기 때문에 물러갔던 군대도 다시 와서 칠 만한 것이다.

    간교한 마음과 은혜

    우리 마음은 너무 간교합니다. 얼마나 간교한지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노라 하면서 새벽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도 겸손해 지지 않고 자아가 더욱 강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자기 경건이 자기에게 달린 양 자기 의로 삼는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믿음 생활한다는 것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종교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간교한 것입니다. 평안한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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