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민수기 23장 27절 - 24장 9절 | 발람의 세 번째 축복, 황폐한 광야에 거하고 있는 에덴 동산과도 같은 이스라엘

2023. 5. 7. 11:29성서유니온 매일성경/민수기

목차


    민수기 23:27-24:9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깨닫지 못하고 재차 저주를 시도하는 발락

    발락은 발람의 두 번째 축복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발람은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발락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뜻을 바꾸실 마음이 전혀 없으심을 나타내셨는데도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발람에게 한 번 더 저주하라고 하고 있습니다(27절). 심지어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라고 합니다. 앞에 나온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자기 뜻만을 관철하려는 죄악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황폐한 광야

    발락은 발람을 데리고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렀습니다. 브올 산에서 보이는 곳은 광야였습니다. 여기 이 광야라는 말은 원어로 황폐하다는 말을 어원으로 하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을 치고 있는 곳(24:2)은 황폐한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대적자의 입으로도 진리를 전하게 하심

    그 황폐한 곳을 바라보면서 발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24:2). 이것은 발람이 참 선지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위에 임하였던 것처럼 임한 것입니다. 사울도 그 때에 예언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은 대적자에도 임하셔서 대적자의 입으로도 하나님의 굳은 의지를 전달하십니다. 3절에 보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발람이 비록 거짓 선지자요 대적자이지만 발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신탁임을 강조합니다. 발람의 말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적자도 자유롭게 사용하십니다. 

    발람의 영적 눈이 열려서 이스라엘의 참 모습을 봄

    3절과 4절에서는 발람이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눈을 감았던 자"라고 하면서 지금 눈을 뜨고 있음을 강조하고 4절 마지막에서는 눈을 뜬 자라고 하여 또 한 번 눈을 떠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음을 말합니다. 즉 발람이 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참모습입니다. 

     

    발람의 세 번째 축복, 황폐한 광야에 거하고 있는 에덴 동산과도 같은 이스라엘

     

    선하고 아름답고 에덴 동산과도 같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참 모습은 아름다움입니다. 선함입니다. 여기서는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토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서 "선"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선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지금 황폐한 곳에 장막을 치고 있는 모습이 선하다, 아름답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지금 그들이 장막을 치고 있는 곳은 광야이지만 물이 풍부한 에덴동산과도 같다는 것입니다(5-7절). 6절에 나오는 귀중한 나무들이 에덴동산의 이미지를 더욱 드러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성소와도 같은 곳입니다. 성전의 원형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거한 곳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계시는데 그곳은 눈에 보이기는 황폐한 광야이지만 실제로는 에덴동산이요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거하셔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대적자 

    7절에 "그 씨"가 나오는데 이 씨는 단수로 쓰였습니다. 그러면서 왕을 언급합니다. 그 왕은 아각보다 높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우두머리입니다. 사울의 대적인 아말렉의 왕을 아각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부분적으로 아말렉에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 씨는 계속 살아서 에스더와 모르드개 때까지 이어집니다. 중대한 대적자 하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만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몰살시키려고 했습니다. 아말렉은 이런 대적자입니다. 이 대적자를 이긴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이 대적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망하게 하려는 세력과 그 우두머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로부터 나오는 씨는 왕인데 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보다 높으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를 대적하여 죽이려고 하거나 넘어뜨리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의 구원도 그러합니다. 

    들소와 사자처럼 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것처럼(8절) 우리 믿는 자들을 죄와 사망 권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아 힘차게 이 땅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들소와도 같고(8절 하) 사자와도 같습니다(9절 상). 즉 대적자를 물리치는 사람들로서 그 힘과 능력이 들소와 사자처럼 큰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는 자는 이렇게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반복됨

    마지막 말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말의 반복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9절 하)."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 정하신 뜻을 변경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도 변하지 않습니다. 발람은 그것을 재차 이야기함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축복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는 것을 발락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는 방식

    우리는 세상에서 복의 근원이 되는데 좀 독특한 방식으로 복의 근원이 됩니다. 내가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내가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나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습니다. 복과 저주가 나의 행위에 있지 않고 나의 정체성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세상이 우리에게 복을 빌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복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다만 주눅들거나 약한 모습이 아니라 담대하고 강한 모습으로 들소와도 같고 사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온유함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이 깃든 삶으로 또한 정확한 진리의 복음이 담긴 말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온 세상을 복되게 하는 길입니다. 

    믿는 자의 특권

    발락의 계략은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두 악인이 모여서 하나님 백성을 저주하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더 드러나고 축복을 함으로 믿는 자의 특권이 어떤 것인지를 더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마음 든든하게 하나님을 믿음으로 오늘을 사시기 바랍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