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마태복음 10장 34-42절 | 세상에 검을 주러 오신 예수님, 그 검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까?

2023. 2. 13. 07:43성서유니온 매일성경/마태복음

목차


    마태복음 10:34-42

    찬송가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세상에 검을 주러 오신 예수님

    검은 전쟁 도구입니다. 전쟁은 양쪽이 갈라져서 싸우는 것입니다. 목숨까지 불사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상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나뉘어서 전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전쟁입니다. 목숨을 잃는 쪽이 이기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뉠 것임

    사도들의 전도사역으로 세상은 예수님을 시인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입니다(34-35절). 예수 찬성파와 예수 반대파로 나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한 집 안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35-36절). 집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고조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는 일(10:21)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이슬람 국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복음 전도는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과 소속을 바꿔 놓음

    소속이 바뀜

    복음전도는 사람의 소속과 생각과 가치관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시인하는 사람은 당시 공동체에서 쫓겨날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요 9:22; 12:42).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배척당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원수가 됩니다. 그것도 한평생 교제했던 사람들과 원수가 됩니다.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생각을 예수님을 의지해서 합니다. 성경을 보아도 예수님이 보이고 자연을 보아도 예수님이 보입니다. 인생에서 겪는 모든 일에서도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렇게 되어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예수님을 믿고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의지하여 모든 것으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편안했던 집안이 사랑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경우

    이렇게 소속과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 사랑입니다. 편안했던 집안이 갑자기 시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집안에서 반대하는 처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할 때입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장면입니다. 재벌집이나 뼈대있는 가문에서 이런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격에 맞는 혼처를 이미 정해 놓았지만 이미 사랑에 빠진 아들은 집안이나 부모나 형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장면에서는 우리 둘이 도망가자는 대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한 평생 키워 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순식간에 아들과 아버지가, 또는 어머니가 원수가 됩니다. 

    이단의 논리는 잘못되었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단이 이런 논리로 자기들의 잘못된 믿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여러 가지로 논박할 수 있으나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8절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 말씀이 그것입니다. 원수가 되어 화평이 깨어졌지만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철없는 아들처럼 막무가내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집안 식구가 가하는 핍박을 감내합니다. 십자가를 집니다. 그렇게 해서 집안 식구들이 그 행실에 감화를 받아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영전(靈戰)은 핍박을 받으면서 수행함

    사이비 이단처럼 물의를 일으키고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공권력을 사용해서 고소 고발하지 않습니다. 부모 자식의 인연을 끊고 재산을 다 거기에 갖다 바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자기 자리에서 핍박을 당하면서 따릅니다. 모든 식구들이 처음에는 핍박하다가도 점점 감화되어 진리로 나아오도록 합니다(고전 7:14). 예수 믿는 것으로 결코 상대방을 강압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것을 영전(靈戰)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전쟁과는 달리 영전은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 전쟁이라고 합니다. 핍박을 받고 목숨을 잃으면 오히려 이기는 전쟁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목숨보다 소중하신 예수님

    전쟁하다가 목숨을 잃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어디까지 사랑하는가, 바로 자기 목숨을 잃는 데까지 사랑합니다(29절). 자기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가족이 중하냐 예수님이 중하냐에서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되고 너의 목숨이 중하냐, 예수님이 중하냐에서도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목숨을 걸고 수행하고 목숨을 잃으면 이깁니다.

    문자적으로 진짜 몸의 생명을 잃기도 하고 영적으로 자기부인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여 혈기로 대적하지 않고 핍박을 받으면 이깁니다. 어떻게 이기는가, 바로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으로 이깁니다.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갖게 되어 그도 예수님 소속이 됩니다.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사도의 사명

    이 모든 말씀은 제자들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사도로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낸 사람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40-42절의 말씀이 더 와 닿습니다.

    사도를 영접한다는 것의 의미

    사도들을 영접하는 것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40절). 그러므로 사도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상 받는 일입니다(42절).

    단지 받아들였을 뿐인데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영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는 것처럼(41절) 하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상응하는 상을 받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전해주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했는데, 사실 받아들인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 주셔서 한 것인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상을 내려주신다니요. 전쟁을 잘 수행한 장수가 상을 받는 것처럼 그런 영광스러운 상을 내려 주십니다. 단지 받아들였을 뿐인데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전도자의 직임

    복음전도는 이런 맛으로 하는 것입니다. 거절 당하고 배척 당하고 심지어 박해를 당하지만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받아들이면 그 결과가 엄청납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이 주어집니다. 전도자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상으로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상을 전달하여 한 사람이 돌아온 것이 전도자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다(살전 2:19). 이 직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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