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장 중간부,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함

2023. 7. 9. 12:14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예레미야 2:20-28

찬송가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자유롭게 하는 율법을 멍에와 결박으로 여김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말씀하십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옛적부터 자기 멍에를 꺾고 자기 결박을 끊었습니다(20절 상).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법(약 1:25)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멍에와 결박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사람이 더 사람다워집니다. 사람이 자기 본성에 맞게 변하는 것이 바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람됨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면 알수록 사람은 그 사랑 안에서 자유를 느낍니다. 율법이 명령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더 자유롭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순기능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자유롭게 하는 율법을 멍에와 결박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잘못 정의하였기 때문에 율법을 벗어나기를 바랐고 실제로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불순종의 길로 향했습니다. 

불순종의 길로 행하여 우상을 숭배함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의 길로 향해서 행한 것은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행음한 것입니다(20절 하). 이 말은 그들이 산 위에 있는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숭배했다는 뜻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남녀 간의 성적 문란입니다. 우상숭배는 간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상의 종교 행사에는 몸을 파는 창기가 사제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상숭배를 음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사람의 인격을 파괴함

이런 우상숭배만큼 사람됨을 파괴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사람을 동물적 존재로 떨어뜨립니다. 사람이 어떻게 동물적 존재가 되는지 23절 이하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사람이 길을 가는데 마치 동물처럼 길을 갑니다. 거기 나온 동물은 빠른 암낙타입니다(23절). 우리는 보통 낙타를 느리다고 생각하는데 낙타가 빠르게 달리면 보통의 말(시속 45km 내외, 경주마는 시속 65km 정도)보다 빠르다(낙타는 시속 60km 정도)고 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달리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가 달리는 행적이 굉장히 어지럽습니다. 사람은 목적을 정하면 그 방향으로 갑니다. 지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물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동물은 성욕이 일어난 들암나귀들입니다(24절). 들암나귀들이 발정이 나면 수컷을 두루 찾아다니고 수컷은 힘들이지 않고 발정난 암나귀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마치 발정난 들암나귀들처럼 우상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우상숭배를 하는데 거기에서 음행하는 모습을 동물에 비유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비유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동물로 격하되는 것까지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장 중간부,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함

 

동물적인 존재로 격하되는 인간

사람이 동물로 격하되는 것에 대해서는 21절에도 나옵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이 말씀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하나님과 마치 친구처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교제한 조상의 자손들을 선택했는데 어떻게 이방 종교로 급속하게 타락했느냐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온 우주 만물 사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온 우주만물에 반영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온 우주만물에 대하여 제사장의 역할을 합니다.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시는 것은 행하고 또 장려하고 악하다고 하시는 것은 금하고 막는 일을 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 이런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히 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 본성을 거슬러 우상을 숭배하러 나갔습니다. 

죄는 스스로 씻을 수 없음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는 스스로는 씻을 수 없는 죄입니다(22절). 아무리 잿물로 씻는다고 해도 아무리 많은 비누를 쓴다고 해도 죄악이 없어지지 않습니다(22절). 모든 죄가 그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범하기는 쉽지만 씻기는 어려운 것이 죄입니다. 이렇게 죄를 범하고도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23절 상)"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지 않느냐 하십니다. 그토록 죄가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25절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함

이 모든 말씀은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사람이 죄에 빠지면 그 인간성이 급속도로 타락합니다. 겉으로는 사람이지만 속은 짐승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어 오직 본능에만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성적인 타락은 그런 현상 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형상을 급속도로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허무가 찾아오니 더욱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죄는 스스로 씻을 수 없습니다. 밖에서 누가 건져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먼저 지적하시고 이들을 정화시키시는데 죽음을 경험하게 함으로 정화시키십니다. 죽음으로 끝나면 정화가 의미가 없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로 나아오고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씻깁니다. 죄는 스스로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