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22장 1-30절 |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축소시키는 엘리바스의 오류

2023. 11. 28. 08:26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22:1-30

    찬송가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재앙을 당하면 악인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욥은 악인이 잘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서 반박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엘리바스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1-3절)" 엘리바스는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는 욥에게 네가 정말 의롭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기쁨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지극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계십니다. 지극한 기쁨 가운데 거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기에 무슨 기쁨이나 유익을 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스바냐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택하신 백성들을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부르시고 기뻐하신다고 합니다(습 3:17). 욥에게 닥친 시련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보시고 기뻐하신 것을 사탄이 참소하여 욥이 재앙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요한복음은 말씀합니다(요 3:16).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말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기뻐하시고 악은 책망하심

    엘리바스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로움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고서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심문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악이 끝이 없느니라(4-5절)" 이 말은 공정하지 않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그냥 두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의를 기뻐하시고 사람의 경건으로 유익을 삼으십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하면 하나님의 선포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사람을 통해서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선을 기뻐하십니다. 이 부분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악을 처단하시는 분이다 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욥의 악이 크다고 합니다. 욥의 죄악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당하는 재앙이 크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욥이 그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엘리바스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욥을 악인이라고 매도함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6-11절)" 10-11절의 욥의 재앙을 보니 6-9절처럼 욥이 악을 행한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이제는 악의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합니다. 그런 악을 욥이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추측만 했으나 이제는 기정사실처럼 정죄하고 있습니다. 올무들이 욥을 둘러 있고 두려움이 욥에게 갑자기 엄습하고 어둠이 임해서 욥이 볼 수 없게 하고 홍수가 욥을 덮은 것을 보니 욥이 약한 자들을 억울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는 논지입니다.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 잡는 일,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는 일,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않은 일,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은 일, 권세 있는 자의 편을 들어 준 일,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 보낸 일, 고아의 팔을 꺾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이 목록을 보면 세상에 저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한 자들을 약하다고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더 착취하는 악한 자들이 세상에는 많은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그런 사람이라고 매도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욥은 재앙을 당하면서 동시에 하지도 않은 일로 정죄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말을 생각해 보면 약한 사람들을 저렇게 착취하는 악인이 재앙을 만나서 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저런 악인이 오히려 권세를 누리고 잘 사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처럼 기계적으로 상벌이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매일성경 | 욥기 22장 1-30절 |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축소시키는 엘리바스의 오류

     

    욥이 하지도 않은 말로 욥을 공격함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을 지키려느냐(12-15절)" 엘리바스는 욥이 하지도 않은 말로 욥을 공격합니다. 욥은 악인이 하나님을 멀리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는 하나님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이 반대로 말했다고 공격합니다. 욥이 악인처럼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계시고 자기를 침삼킬 동안도 가만히 안 두고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동시에 자기는 이런 큰 고통을 당할 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욥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주장했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시고 자기를 대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만약 욥이 의롭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그것을 모르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네가 의로운 것이 맞는데도 재앙이 임했다면 하나님께서 모르시니 너에게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옳지 않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논리에 자기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 논리는 악인은 재앙을 선인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끼워맞추다 보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아닌 비인격적 법칙처럼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욥의 말을 비틀어서 욥을 공격함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16-18절)" 엘리바스는 욥이 말한 것을 가지고 와서 비틉니다. 욥은 악인이 평안한 중에 하나님을 멀리한다고 했습니다(21:7-16). 그런데 엘리바스는 악인들이 망했을 때 하나님을 멀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악한 자라도 망하면 마음이 겸손해지는 법입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돌아보게 되는 법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말을 비틀어서 욥이 지금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놓아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으로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19-20절)" 악인이 망하는 것은 의인들에게 기쁨을 안겨줍니다. 이 기쁨은 공의가 적용되는 것을 보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이것을 보면서 마냥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에게도 저런 죄가 없는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원수가 목마르면 마시우고 헐벗으면 입힙니다. 그렇게 원수에게까지 자비를 베풉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내리실 때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마 5:45). 

    욥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말로 조언함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1절)"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욥이 참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당하는 재앙에 상응하는 악이 자기에게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그런 악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답답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욥이 죄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욥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당하는 엄청난 재앙, 초자연적인 재앙에 상응하는 큰 죄악을 자기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욥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을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이 비치리라(22-28절)"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욥이 전능자에게서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더 깊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은 이미 문제가 해결된 사람에게는 위안이 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 중에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고통이 계속되는 것을 지금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 후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고백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전에 고백했던 것과 같지 않습니다. 더 깊습니다. 단순히 이런 원리를 따랐더니 하나님께서 그 원리대로 회복해 주셨다, 이런 수준이 아닌 것입니다. 고통을 통과한 후에 나오는 은혜 고백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난 후에 나오는 은혜 고백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음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29-30절)" 엘리바스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죄가 있어도 건져주신다고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없이하시고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싹싹 빈다고, 스스로를 낮춘다고 건져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없이하셨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다 없이하셨습니다.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할 때 그 사람이 겸손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손이 깨끗한 것도 하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깨끗한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이 점에 있어서 틀렸습니다. 그의 말은 욥에게 위안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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