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17장 16-34절 |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2024. 6. 7. 19:34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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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사도행전 17:16-34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빌립보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자기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 빌립보에서 루디아와 그 가족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디아와 그 집의 모든 사람은 세례를 받았습니다(16:14-15). 옥에서 만난 간수와 그 가족 모두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16:33). 이렇게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 후 바울과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서 구약 성경의 뜻을 풀어 구약 성경이 가리키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증언했습니다(17:3, 11). 그 결과 수많은 이방인들, 특별히 헬라인들이 믿었습니다(17:4, 12).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 일행을 박해했습니다. 바울은 그 박해를 피해서 일행과 갈라져서 먼저 아덴에 도착했습니다(17:15). 아덴은 지금의 아테네입니다. 

    아덴에서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렸습니다(16절, 17:15). 기다리면서 바울은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습니다(16절 하). 여기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는 영광이 우상에게 돌려지는 것에 분노합니다(사 42:8 참조). 이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변론하니

    마음에 격분이 일어난 바울은 변론을 하고 다녔습니다(17절). 그는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을 했고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디아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입니다. 이 말은 양편이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이성인 대화가 오고가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과 변론하던 사람들 중에서는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쟁론할새

    18절에 보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했다고 합니다. "쟁론하다(συμβάλλω)"는 어떤 주제를 함께 논의한다는 뜻입니다. 철학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을 말쟁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을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쟁이(σπερμολόγος)라는 말은 "씨"가 되는 말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소문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 신들을 전한다고 한 이유는 바울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말쟁이와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

    이 두 가지 모두 일말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종 씨로 비유되기 때문입니다(눅 8:11; 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은 씨처럼 마음 밭에 떨어집니다.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자랍니다. 점점 장성하게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각하면 점점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장성하게 자라게 됩니다(엡 4:13). 또한 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전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우상과 철학의 공통점

    16절에서는 우상이 성에 가득하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나옵니다. 이 당시에 우상과 철학은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을 피하는 기능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우상에게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제물을 바쳤습니다. 제물을 바치고 신탁을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지혜롭지 못한 결정을 내리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질병에 걸리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각각의 신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가령 전쟁의 신은 아레스였고 지혜의 여신은 아테나였고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은 아스클레피오스였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는 대표적인 철학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에피쿠로스 철학과 다른 하나는 스토아 철학입니다. 둘 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를 논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추구하는 쾌락은 적극적인 의미의 쾌락이 아니라 소극적 의미의 쾌락입니다. 즉 고통이 없는 상태를 쾌락으로 본 것입니다. 오히려 에피쿠로스 학파는 적극적인 쾌락 추구를 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고통을 가중시키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육체적 고통이 없고 영혼에 불안이 없는 상태를 추구했습니다. 그런 평정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부릅니다. 아타락시아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이들이 제시한 것은 자족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줄이면 쉽게 만족하게 되고 평정상태를 더 잘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에피쿠로스 철학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제시한 방법입니다.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도 비슷합니다. 먼저 스토아라는 명칭은 서양 건축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주랑을 뜻합니다. 창시자인 제논이 주랑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스토아 학파가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진단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합니다. 가령 내 생각이나 충동이나 욕구나 혐오 같은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육신이나 재산이나 평판이나 직위 등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겪는 수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서 초래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약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욕망이나 감정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이성에 따른다면 그는 정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이 상태를 아파데이아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는 고통을 피하는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 즉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속한 것에 집중하라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우상과 철학의 차이점

    우상과 철학이 다른 점은 우상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것에 의지한다면 철학은 자기 스스로를 의지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둘 다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똑같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와 복음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우선 복음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가장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가장 우선하는 가치는 유일하신 삼위 하나님을 알고 믿어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서 고통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지합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7:18)" 

    새로운 가르침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사람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붙들었습니다(19절).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20절). 이것이 그들이 시간을 쓰는 방식이었습니다(21절).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웠습니다(21절 하). 이것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화와 철학이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그들에게 참된 유익을 줍니다. 드디어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 아레스(마르스)의 언덕

    바울의 복음 전도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사람들의 요청에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22절). 아레오바고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아레이오스 파고스(Ἄρειος πάγος)"입니다. 이 말은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말입니다. 아레스는 전쟁의 신입니다. 이 언덕은 당시에 재판하는 곳으로 쓰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종교성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22절). 이 종교성이라는 말은 많은 신들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23절).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자기들에게 해코지 할 것을 두려워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 하)"라고 합니다. 

    참 신은 어떤 분이신가

    바울은 하나님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창조하신 후에 가만 계시지 않으시고 천지를 주재하시는 분이십니다(24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24절 하). 손으로 지은 전이라는 말은 우상과 연관되는 말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에 매이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25절에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25절 상)" 즉 하나님은 우상과 전혀 다르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십니다(25절 하).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바울은 이제 초점을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 옮깁니다. 사람이 이렇게 온 땅에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고 그들의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기 때문입니다(26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음어 찾아서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27절).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을 힘입고 있기 때문입니다(28절 상).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당시 헬라 시인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28절 하)" 이 시인은 헬라의 아라투스나 클레안데스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당시 신화를 따라서 제우스를 가리켜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인용하면서 이 시에 합당한 분은 제우스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이교도가 자기들의 신에 대하여 표현한 가장 고상한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적합한 것입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359쪽). 

    사람이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말의 뜻

    여기까지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은 우상과 다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29절에서 그 점을 확실히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금이나 은이나 돌이나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은 전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이런 존재로부터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먹고 마시고 듣고 깨닫고 보고 아는 사람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제우스와 같은 우상의 소생이 아닙니다. 

    새 시대가 열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은 이제 회개를 권고합니다(30절).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명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가 갔고 이제 확실히 아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는 증거로 확실해졌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입니다(31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의 날이 작정되었습니다(31절). 이 심판의 날을 예비하는 방법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 믿으니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습니다. 조롱하는 사람과 다시 듣겠다는 사람으로 갈린 것입니다(32절). 바울의 이 설교로 몇 사람이 바울을 가까이하여 믿었습니다(34절). 그 중에 아레오바고 관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은 우상이 가득한 아테네에 울려 퍼지고 하나님께서 거기서도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우상과 철학의 근거지에 복음이 울려 퍼져서 사람이 사는 목적이 고통을 피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믿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 있음을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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