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마태복음 15장 21-39절 |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부스러기 은혜의 풍성함

2023. 3. 2. 06:04성서유니온 매일성경/마태복음

목차


    마태복음 15:21-39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거기서 나가심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거기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과 사람의 정함과 부정함에 대해서 논한 자리입니다. 사람의 정함은 손을 씻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각종 부정한 것이 나오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람을 정하게 하려면 제사와 제사 때 드리는 제물의 피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사장이시면서 제물이 되셔서 그 고귀한 피를 흘리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택함을 받은 자들의 죄를 사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다르게 반응하는 이방인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인가 아닌가 확인하려고만 했습니다(15:1, 16:1).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시라면 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가를 문제 삼았습니다(15:2). 또한 메시아이신 표적을 구했습니다(16:1). 이스라엘의 이런 불신앙과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고(22절, 31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31절). 

    예수님의 긍휼은 민족을 가리지 않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방인들에게 3일 동안이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32절). 이들은 먹을 것이 다 떨어져가도록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굶겨 보내지 않으시고 풍성하게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두로와 시돈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고 나옵니다(21절). 거기서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지 않으시고 아무도 모르게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막 7:24).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음을 책망하시는데 거기에 두로와 시돈이 등장합니다(마 11:21-22). 만약 두로와 시돈에서 이적을 행했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이후에 두로와 시돈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복음이 이방으로 향함을 보여주는 암시입니다. 

    자녀들의 부주의함이 개들의 양식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당당히 식탁에서 음식을 제공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스러기를 바닥에 흘리면서 예수님께서 제공하신 떡을 부주의하게 대했습니다. 부스러기 은혜가 이방인에게 떨어졌고 이방인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잠시 물러나심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에서 대대적인 사역을 하실 생각이 없으셨습니다(막 7:24).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천국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24절). 하나님의 경륜 순서상 먼저는 이스라엘이요 나중이 이방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으로 가신 이유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물러나시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당국의 주목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방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이 다윗의 자손을 부름

    아직 하나님의 경륜 상 아직 때가 이르지는 않았지만 거기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한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다윗은 이방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전쟁으로 주변 나라를 평정하고 그들을 종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가나안 사람인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겠습니까?

    이스라엘 집의 메시아가 너와 무슨 상관이냐

    이 여인은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자기를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은 그 여인의 부르짖음에 한 말씀도 대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23절). 제자들이 청하니까 그제서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심으로 그 여자가 소리 질러 구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다윗의 자손으로 아느냐, 그러면 나는 이스라엘 집의 메시아다, 그런 나와 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당신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그 말의 의미 그대로 행동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에게 은혜를 받을 대상

    예수님께서 아무 말도 없으시다가 말씀으로 반응하시자 여인은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예수님께 절하면서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내가 너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가까이 나아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집에 속한 사람들은 자녀로서 다윗의 자손인 나에게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지만 이방인은 개가 아니냐 너희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힌트를 발견함

    이 말씀에서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 힘을 얻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개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힘을 얻었을까요? 답은 개라는 말의 뜻에 있습니다. 개를 헬라어로 보면 퀴나리온(κυνάριον)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작은 개를 뜻합니다. 큰 개, 길에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가 아닙니다. 그런 뜻의 개를 말할 때는 퀴온(κύων)이라는 말을 씁니다. 주인이 없으므로 들에서 죽은 것을 먹거나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연명하는 개가 퀴온입니다. 반면 퀴나리온은 집에서 기르는 작은 개를 뜻합니다. 주인이 있는 개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이 일은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퀴나리온은 집에서 기르는 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나안 여인에게 힌트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도 이스라엘 집에 속할 수 있다는 힌트입니다. 여인은 그 힌트를 붙잡고 자기들이 개인 것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주인이 있는 개가 아니냐고 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기서 주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31절)입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여인의 말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이시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오신 것이 맞습니다마는 그 집 안의 개들도 부스러기를 받아먹듯이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옵소서, 그것으로 충분하나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식과 믿음을 끌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부스러기 은혜의 풍성함

    병 낫는 기적에 앞서 믿음을 세워야 함

    예수님은 여자로 하여금 다윗의 자손으로 온 메시아가 자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확실히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바른 믿음 위에서 기적을 맛보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이 병 낫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바른 믿음이 없이는 당장 병이 나을 수는 있어도 영생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사상 체계에 바른 믿음을 세워주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집 주인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그 집에 속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셨지만 온 인류,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창 12:3, 22:18).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사상체계에 이러한 바른 믿음을 세워주시고 또 그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질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모습은 이 여자의 믿음을 바로 세우시기 위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큰 무리

    이 이방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사건에 이어서 이방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보고 깨닫는 사건이 나옵니다. 31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당신님께서 메시아시라는 것을 알려주실 때 나온 내용(마 11:5)과 같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씀으로 보아서 이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고 자꾸 메시아이신 것을 증명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바로 알아보고 자기들의 우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본 이방인들에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3일 간이나 가르치셨습니다(32절). 부스러기 은혜가 이방인들에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천국 복음이 이방으로 전해질 것을 암시합니다. 

    영의 양식뿐만 아니라 육의 양식도

    예수님께서는 3일간의 사경회 이후에 먹을 것이 떨어진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말씀으로 영의 양식을 제공하시고 이제 육의 양식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육의 양식을 모두 제공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참 양식이요 참 음료이십니다. 우리가 생존하여 사는 것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믿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다 예수님을 의지해서 존재하고 또 예수님으로 양식과 양분을 삼아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일곱 광주리

    그렇게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셨습니다. 여기서 광주리(σπυρίς)는 바구니(κόφινος, 마 14:20)와 다릅니다. 광주리가 바구니보다 더 큽니다. 바구니가 20리터 정도 담을 수 있는 크기라면 광주리는 50-100리터를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광주리는 열두 바구니보다 많은 양입니다. 이렇게 남은 음식을 거두어 멀리서 온 사람에게 나눠주었을 것입니다.

    영과 육의 음식을 제공 받은 이방인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제공했을 때에는 열둘이라는 숫자가 남았고 이방인에게 떡과 물고기를 제공했을 때에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남았습니다. 열둘은 사도와 연관되고 일곱은 이방인들로 구성된 집사와 연관됩니다. 후에 이들이 함께 교회를 이룹니다. 이 숫자가 그런 것까지 상징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여기서 예수님께 음식을 제공받은 이들이 이방인들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박윤선, 공관복음 주석 410쪽). 

    부스러기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

    우리도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부스러기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은혜를 받은 것은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말씀합니다.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신 것에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해야겠습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겠습니다(롬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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